어느 여름, 그 애와 공원을 걸었던 밤을 기억한다. 어두운 공원엔 듬성듬성 조깅을 하는 사람들만이 우리를 지나쳤다. 나는 불편한 기색으로 그 애의 곁에서 한 뼘 떨어져 걸었다. 그 애는 조금은 물렁해진 군복을 만지작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 듯 걸었다. 우리는 같이 걸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고, 그래서 함께 걷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 모금 먹은 맥주에 체할 것만 같았다.
벤치 앉자마자 그 애가 말했다. “어..내가 너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말의 기운은 참 이상하다. 운을 떼는 것만으로도 다음 이어질 말을 금세 알아채고야 만다. 그래서 난 비겁하게도, 늘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듣지 않았다. 다음 이어질 말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억눌려있던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애는 다음 말 대신, 어설프게 나의 등을 두드리며 화장실로 나를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어쩐지 애처로웠다. 나에게 사랑이란 없을 거야. 그 누구도 걸지 않던 저주를 나에게 걸고야 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애는 다음 말 대신 나의 손을 괜스레 꼭 잡고, 말했다. “넌 손이 참 작다” 잡힌 손을 빼냈지만 사실 내가 빼낸 건 손만은 아니었다. 그 애의 진심이 나에게 얹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앞으로도 사랑하지 못할 거야. 그런 마음만이 내내 나의 주위를 감싸안았다. 그 안에서 나는 겉으로는 안온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따듯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 애와, 얼마 전 버스에서 마주쳤다. 그 애는 그간 나의 연락부재에 서운함을 담은 말을 건넸다. 이제 괜찮아진 너와 아직도 그 기억을 붙든 나는 그렇게 또 엇갈린다. 나는 아마 평생 사랑을 모르고 살 거다. 아니 애초에 사랑을 정의 내릴 수 있는건가? 나에게 한번도 정답을 주지 않았던 사랑을, 누군가 단언하듯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 능력을 훔쳐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말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