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 암막 커튼의 빈틈을 찾아 베개를 이리저리 덧대는 건 오래된 습관이다. 겨우 빛을 차단하고 누운 뒤 손을 침대 헤드로 쭉 뻗는다. 항상 대기 중인 이어플러그를 찾기 위해서다. 그렇게 눈과 귀를 단단히 막고서야 비로소 하루가 마감된다.
그래서인지 한여름 장마철이 되면 수시로 곤란해진다. 귓가에 가만가만 와 닿는 빗소리가 맞춰 놓지도 않은 알람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잠은 어느새 달아나 있다. 눈을 꼭 감고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소리를 세다가 지새게 되는 밤은 기어코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잠에 예민하다는 나의 주장은 언니와 엄마에게 먹힌 적이 없다. 막내딸의 말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두 모녀가 가끔은 치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증거를 내밀면 입을 꾹 다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지는데, 엄마의 주장이란 이렇다.
생활 리듬이 다른 탓에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여전히 꿈나라에 있는 딸을 엄마는 잠이 많아서 그런다고 생각한다. “너 하루조옹일 자잖아. 너만큼 많이 자는 사람이 어디 또 있는 줄 알아?” 주말에 낮잠 30분 자는 걸 열린 방문 틈으로 슬쩍 쳐다보곤 했던 엄마는 딸을 대왕 잠만보라 여기는 듯하다. 평일의 에너지를 주말에 끌어다 쓰는 나는 변명할 기운도 없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언니도 슬쩍 자신이 가진 또 다른 증거를 내민다.
언니가 형부랑 브라질 ‘마나우스’에 살던 시절의 얘기다. 그때 나는 백수였다. 비행기를 두 번은 갈아타야 하고 경유 시간까지 합쳐서 30시간이 걸리는 마나우스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마침 타 지역으로 출장을 가 있던 언니와 상파울루에서 만나 같이 가기로 했다.
분명 상파울루에 가는 동안은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잤는데, 언니가 옆에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내 조느라 옆에 앉은 승객의 어깨에 자꾸만 고개를 떨어뜨렸다.
승객은 내가 잠깐이라도 닿을라치면 어깨를 들썩이며 조금의 기댈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눈이 계속 감겼다. 내리기 직전 잠이 덜 깬 얼굴로 마주한 건 옆자리에 앉은 승객의 경멸 섞인 시선이었다. 비난의 눈빛에도 졸음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언니와 형부가 함께 지내는 마나우스 집에서도 생전 겪은 적 없던 잠의 수마에 시달렸다.
두 사람이 출근해 있는 사이 내가 한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잠과 사투를 벌이는 일. 언니와 형부가 퇴근하고 돌아와도 눈도 못 뜬 채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잠이 이렇게까지 쏟아져도 되는 건가, 일상이 꿈이고 꿈이 일상인 채로 두 달을 지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니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잠에 예민하다 주장하는 잠만보 내 동생이 미덥지 않은 건 당연했다.
최측근들의 말을 곱씹어보니 그간 ‘졸음의 역사’가 줄지어 지나간다. 요가의 마지막 단계인 ‘사바아사나’ 시간만 되면 꼭 잠에 들곤 하던 나른한 아침들. 모델링 팩을 받다가 코를 골았던 창피한 오후 12시. 통학하던 버스에서 졸다가 창문에 세게 머리를 박았던 새벽 6시의 덜컹거림.
덜렁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고,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최소한 나는 잠에서만큼은 아닌가 보다.
이 글을 수정하고 있는 지금도 또다시 몰려오는 잠에 가물가물한 눈을 치켜뜬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한없이 늘어지고, 무거워진 고개는 동서남북 꾸벅일 준비를 마친 듯하다. 소리 없는 하품이 입안을 맴돌다 꿀꺽 삼켜진다. 졸음의 역사가 새롭게 써진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