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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치돈 Feb 12. 2021

화이트 러시안과 니힐리즘: <위대한 레보스키>


대학 입시를 일찍 끝내서 학교에 가도 할 일이 없었던 2016년 10월, 자습 시간에 담임 선생님한테 제출할 입시 참고 자료를 작성하는 척하며 하루에 영화 한두 편을 봤다. 영화를 능동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또는 겪어야만(…) 하는 몇 단계가 있고 이는 크게 두 가지의 리스트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리스트에는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 <이터널 선샤인> 등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리스트에 올라온 이름들의 가장 명확한 공통점은 이 리스트에 속한다는 것이고 지드래곤과 같이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은 연예인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비-주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이미지 기반의 소셜 미디어가 대두하면서 다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번째 리스트는 영화사에 중요한 고전 작품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만큼 첫 번째 리스트보다 더 심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시네필 안내서’를 비롯한 각종 영화 잡지나 사이트의 랭킹을 참고하고 처음부터 에이젠슈타인이나 브레송을 찾아보는 것은 비효율적일뿐더러 우선 재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첫 번째 리스트에 더 가까운 <대부> 3부작을 다시 보면서 나만의 시네필 입문기를 시작한 것 같은데, 아트하우스와 컬트 영화까지 넓은 분류에 걸쳐서 영화를 보면서 봤던 작품 중 <위대한 레보스키>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첫 동아리에 지원할 때도 언급할 만큼 가장 기억에 남았다. 당시에 썼던 내용을 다시 읽어보자면...


“… 그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치관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레보스키>는 러닝타임 내내 괴상한 매력을 어필합니다. 이 영화의 특별함은 장면 배치와 캐릭터 구성, 갈등 관계, 등장인물들의 존재 이유, 각 인물의 언행 등 무언가가 그렇게 배치된 의도의 파악이 불가능한 것들에 있습니다. 이러한 기괴함 뒤에는 굉장히 중요한 인생에 대한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인공처럼 경쟁과 권력, 부만이 우선되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기대하는 성공의 의미를 충족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성공이 유발하는 스트레스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The Dude abides.”라는 영화의 명언을 만들어냈습니다. 힘든 입시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앞으로 들이닥칠 경쟁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던 저에게, 이 영화는 목표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해도 그 과정에서 어렵고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부딪힌다면 침착하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더 일찍 봤었더라면 늘 피로에 의해 쫓기기보다는 제게 주어지는 시간을 고맙게 여기며 고등학교 생활을 더욱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위대한 레보스키>를 본 것은 제가 보다 성숙한 의식을 갖게 되는 기회가 됐고, 제 성격과 가치관을 소개하는 데도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썼던 지원서를 다시 읽어봐도 딱히 감상평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레보스키>는 ‘듀드’라고 불리는 제프리 레보스키를 중심으로, 굉장히 어수선하고 게을러 보이는 한 무직 백수에게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들을 보여준다. 그는 하루하루 보드카와 우유를 섞은 화이트 러시안을 마시며 그의 삶의 낙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월터, 그리고 딱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도니와 볼링장에서 시간이나 죽이는 것이다. 듀드는 옆 동네에 사는 백만장자인 제프리 레보스키와 이름이 같은 탓에 어느 날 백만장자 레보스키를 찾던 괴한들이 집을 침입하고 한 명은 그가 아끼는 양탄자에 오줌을 싸기에 이른다. 양탄자를 너무나도 아끼던 듀드는 레보스키를 찾아가 보상해달라고 하지만 오히려 레보스키는 듀드를 한심하게 대한다(그런데도 불구하고 듀드는 양탄자 하나를 챙기고 나온다.) 그러나 며칠 뒤 레보스키는 듀드에게 자신이 엮인 한 사건의 전달책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듀드가 이러한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나머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오해에 오해가 더해지고 전체적인 스토리가 파국에 치달을 때 가장 결백한 캐릭터가 죽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위대한 레보스키>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도교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패러디 종교 ‘dudeism(듀드주의)’와 ‘Lebowski Fest’라는 축제까지 매해 열릴 만큼 열광적인 팬덤 문화를 낳았다. 이 영화에서 듀드가 자주 마시는 화이트 러시안도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코즈모폴리턴처럼 하나의 상징적인 칵테일로 여겨지기도 하고, 나도 괜히 듀드주의를 표방하며 술을 마실 때 늘 화이트 러시안이나 블랙 러시안을 마시곤 했다. 어쩌면 각종 기이한 사고가 끝없이 일어나고 괴한들이 들이닥쳐도 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엉망진창 그 자체인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부러웠던 것일 수도 있다. 나와 이름과 성이 모두 똑같은 억만장자를 만났음에도 기죽지 않고 진심으로 필요한 양탄자 하나만 챙기고 나오는 태도를 닮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위대한 레보스키>를 처음 보고 감동하며 성격을 재편해야겠다고 결심한 지 4년이 지난 오늘도 거의 매일 새로운 막막함 앞에 좌절할 뻔하지만 그럴수록 이 영화를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또한 듀드를 괴롭히며 차에 불을 지르는 듯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영화 속 니힐리스트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인생의 무가치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배 계층 또는 집단에 의해 정립된 기존의 상징체계에서  벗어난다면 현실이 고정된 위계질서의 장막으로 은폐되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으리라 믿는다. 듀드를 완전히 전복적인 캐릭터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나 적어도 삶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거의 일상적 이미지들을 그대로 나열한 앤디 워홀의 예술적 이론과도 유사해 보인다. "The Dude abides."는 시류에 무조건적으로 편승하거나 무엇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에 고개를 끄덕여 찬의를 표하는 것이다. 삶의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능동적인 자세의 첫 단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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