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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치돈 Feb 08. 2021

질서와 무질서, 통제와 불안 사이의 <잔느 딜망>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적인 세계관을 반영하여 여성의 몸을 그대로 응시하는 영상 문화는 시선과 권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현실을 되비추는 거울로서 작용하는 영화 및 영상 매체는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의 시각을 주저 없이 반영하여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 안에서만 여성을 재현해왔고 이러한 재현 방법은 보통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각을 함의해왔다. <잔느 딜망>은 이 구도를 그대로 적용하며 ‘여성’으로 규정된 두 가지, 그러니까 성스러운 어머니와 성적인 창녀를 한 인물 안에 연결하여 현대 사회의 가부장적인 이분법으로 인해 생긴 두 가지의 억압적인 역할을 탐색하는 여성에 대해 논의를 하고자 한다. 

3시간 동안 잔느 딜망은 매일 일어나 아침 식사를 차리고, 집안일을 하고, 매춘을 하며 돈을 벌고,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을 차리고, 편지를 읽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루틴은 3일 내내 단순히 반복될 것으로 보이지만, 세 번째 날부터 잔느 딜망은 아주 작은 ‘오류’들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 사소하고 조용한 오류들은 마지막 날의 충격적으로 고요한 클라이맥스로 이어진다. 

둘째 날 오후부터 딜망의 루틴은 어딘가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본래 단추를 잘 꿰매고, 머리도 단정하고 완벽하게 빚어놨던 딜망에게 그의 아들은 “단추를 잃어버렸네요”, “머리가 헝클어졌네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딜망의 잘못되기 시작한, 하나의 오류가 또 다른 오류로 이어지며 결국 살해로 이어지는 과정은 가정의 유일한 남성인 아들에 의해 시작된다. 이는 여성이 온전히 몸을 담그고 있던 사적 영역마저도 온전히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나타낸다.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잘못된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이를 꼬집고 ‘고치라는’ 남성의 목소리는 일종의 파놉티콘처럼 작용하여 여성의 자가 억압을 유도한다. 남성의 압박에 의해 사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은, 그 안에서도 자유로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다. 본인이 완전히 컨트롤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사적 영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잔느 딜망의 인생 자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여성 운동가 실비아 페데리치는 ‘Wages Against Housework’라는 에세이를 통해 1970년대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전개했다. 재생산 노동이란 곧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으로, 곧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을 말한다. 육아, 가사, 도우미, 노인 돌봄 서비스처럼 일부 재생산 노동은 임금 노동으로 편입되고 하나의 산업으로 재구조화되었지만, 아직도 대부분 가정에서 이뤄지는 가사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노동으로, 그리하여 가장 소외된 노동으로 존재한다. 페데리치는 재생산 노동은 생산 노동과 똑같이 임금을 지불받아야 하고, 재생산 노동의 가치 절하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저평가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후에야 재생산 노동의 불공평함을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을 허함으로써(wages for housework) 자본주의를 싸우자는 것(wages against housework), 즉 일종의 ‘이이제이’적인 논리로도 읽힌다. 

페데리치의 주장은 명확하게 반자본주의적인 메시지를 기저에 두고 있다. 가정 내 여성의 노동을 지불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임금 상태에 있는 전 세계 압도적 다수의 노동과 투쟁을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한다면 가사노동도 노동력이라는 상품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이 가사노동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여성 해방은 자본주의 안에서 머물러 있으며 완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서구 자본주의라는 1세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잔느 딜망은 백인이라는 인종적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여성 노동자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가 살아가는 가정은 공장의 일터와 유사하며, 결국 자본주의가 기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잔느 딜망의 주방은 공장이자 감옥이다. 마치 완벽한 로봇 혹은 기계처럼 작동하던 딜망의 파멸은 작은 오류로 시작되어 그 오류는 일종의 공장장과도 같은 남성에 의해 언급되고, 딜망의 오작동은 그렇게 시작된다. 공장에서 가장 노동자의 위치를 위협하는 것은 ‘부동’이다. 기계를 작동하고 조립하는 리듬에 맞추지 못하고 ‘정지’하게 된다면, 노동자는 기계에 의해 무너질 수 있고 결국 공장 전체가 셧다운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딜망이라는 노동자에게 공장은 집이었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본인과 아들을 위한 요리와 청소, 그리고 그의 유일한 자본 활동인 매춘이다. 지급되지 않는 가사 노동과 지급되는 성 노동의 대립을 기반으로, 가정 안에서도 그의 가사 노동은 사적 영역, 그리고 성 노동은 공적 영역으로 분류된다. 우리에게 보이는 딜망의 3시간은 착취와 피해가 아닌, 가치의 담론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The personal is political."은 여성의 사적 영역이 곧 정치의 장이라는 말로, 여성의 성 역할로 여겨져 온 가정 관리 및 가사 노동 또한 정치적인 억압의 한 종류임을 뜻한다. 아커만은 바로 이것이 영화의 핵심에 있다고 한다. 영화의 원제목은 잔느 딜망의 집 주소이다. 그는 제목에서조차 가정과 떼어질 수 없다. 아커만은 잔느 딜망을 가정 안에 철저히 갇힌 존재로 그림으로써 이러한 결과를 낳은 가부장적인 전통과 젠더 질서의 문제점을 시사한다. 우리가 편지를 보낸다면 답장을 보내줄 것만 같이 실존 인물처럼 느껴지는 잔느 딜망은 매일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욕망과 억압 사이의 경계 위를 밟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어머니, 언니, 친구 -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여성 개인의 삶이 공공 정치의 장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는 아커만 감독의 말을 기억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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