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무너졌어

감정이라는 폭군

by 무연


연애에 실패한 날이 아니더라도, 나는 종종, 어쩌면 자주, 요동치는 감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정은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왕이었고, 나는 그의 곁을 지키는 충실한 신하였는데, 그 왕은 때론 폭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신하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이 충성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하나 싶다가도, 이상하게 나는 또다시 고개를 조아리고 만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모든 것이 무너졌다. 누가 날 싫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무시를 당한 것도 아니고, 어떤 상처를 주는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작 큰일은 없었는데, 내 안에서는 모든 게 쏟아졌다. 감정이라는 댐이, 뚝, 하고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그것은 예고 없이, 참 조용히, 천천히, 치명적으로 일어났다.


무너지기 전에는, 늘 사소한 전조들이 있었다. 메시지에 마침표가 많다거나, 상대가 보내는 말투가 어딘가 차갑다거나, 거울 속 내 얼굴이 너무 낯설다거나. 그런 아주 작은 신호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무너짐을 만들었고, 나는 그 무너짐에 늘 압도당했다.


그 밤의 나는, 어지럽게 흐트러진 방 안에서 이불을 껴안은 채 웅크려 있었다. 몸이 무겁고, 생각이 무뎌졌다가, 갑자기 너무 예민해졌다. 창밖의 풀벌레 소리, 전기선에서 나는 윙 소리, 냉장고의 진동음까지 죄다 나를 찔러댔다. 그것들은 마치 내 불안이 만든 환청처럼, 나를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도 나를 다룰 수 없어진다. 무너진다는 건, 단순히 슬퍼지는 게 아니다. 뼈대가 휘고, 마음이 주저앉고, 정신이 공간에서 이탈해버리는 기분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살아만 있는 것. 고요한 생존.


그날 나는 감정 없이 울었다. 이유 없이, 끝도 없이, 말도 안 되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에도 눈물이 나고, 숨을 내쉴 때도 마른 눈물이 났다. 마치 몸 안 어딘가에 있던 오래된 고장이 갑자기 전신으로 퍼진 것처럼. 내가 아픈 건가, 미친 건가, 그냥 피곤한 건가, 그런 판단도 이미 사치였다. 그저 흐르고, 주저앉고, 또 흐를 뿐이었다.


무서운 건, 그 감정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감정은, 인간을 소화하지 못한 채 끝없이 씹어대는 입처럼 나를 삼키고 있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까지 무너져 있으면, 생명이란 게 스스로 꺼져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아주 조용한 예감.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예감은 조금 평화로웠다. 죽음이 아니라, 사라짐.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공포이면서 동시에, 아주 유일한 안도였다. 끝없이 반복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정지’ 버튼처럼 느껴졌던 것. 다 잊고, 다 멈추고, 그냥 가만히 있는 상태.


그렇게 몇 시간을 버텼다. 아니, 버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흘렸다’. 시간이 흐른 게 아니라, 내가 흘러내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내 몸과 마음이 바닥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새벽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나는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부서지고, 내가 말하는 ‘회복’은 진짜 회복이 아니라 단지 ‘다시 일어남’이라는 걸. 그날 이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감정은 내 위에 군림하고, 나는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살아간다. 회복은 하지 못했지만, 다음 감정의 폭풍을 대비해 마음에 모래주머니를 하나 더 달아두는 것. 그게 지금의 나다.


그렇게 나는 또 감정이라는 무자비한 왕 앞에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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