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감정 덩어리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됐었다. 그날의 나는 그 사실을 다음 날 오후 즈음에야 깨달았다. 참 서글픈 타이밍이었다.
별일 아니었다. 정말로, 객관적으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 평화로운 오후, 점심을 먹고 으레 갖는 티타임 속이었다. 나를 괴롭히지 않는 잔잔한 감정 사이에 오고 가는 재미 어린 수다였다. 그러다 무심결에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친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요즘 내가 조금 서운하다고 느끼고 있던 말을 전했다. 평소 같으면 성난 황소처럼 앞뒤 보지 않고 쏟아냈을 말을 정말 조심스럽게, 돌다리를 두들기며, 말끝마다 “근데, 이건 내가 너무 예민한 걸 수도 있어.”라는 면죄부도 끼얹으며.
상대는 의외로 웃었다.
“에이, 그런 의도 전혀 아니었지. 근데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상대는 진심이 담긴 듯한 미안함을 건네고,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미안해’에 걸리고 만다. 그 말이, 너무 빠르게 나왔던 것 같았다. 진심이었을까? 미안한 얼굴이었나? 아니, 그 전에 내가 이 말을 왜 꺼냈지? 내가 굳이 이 말을 했어야 했나?
그때부터 감정의 재생 버튼이 눌렸다. 대화 장면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지 모르겠는데….”
“혹시 그때 너가 나한테 했던 그 말이…. 좀 걸렸어.”
그 순간의 표정. 친구의 눈썹이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간 것. 말끝에 살짝 정적이 있었던 것. 어쩌면 그냥 숨 쉬었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내내 그 정적을 곱씹었다. 한 박자 늦은 호흡이, 내 말에 대한 무언의 불쾌함은 아니었을까? 말은 웃으며 했지만, 속으론 짜증이 나지 않았을까?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나는 그 한마디로 하루를 날려버렸다.
‘왜 그 말을 꺼냈을까?’
‘그 친구, 나랑 거리 두는 거 아닐까?’
‘그날 이후로 카톡 빈도가 줄어든 건, 아니겠지?’
머릿속은 금세 회의실이 됐고, 나는 나를 대상으로 끝없는 회의를 시작했다. '발언자의 진심은 무엇이었는가', '비언어적 표현의 해석은 타당했는가', '말을 꺼낸 나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이었나', '사과의 어조는 몇 도였나' 등등.
그날 하루는 그렇게 나 자신과 나 자신 사이의 끝없는 청문회로 이어졌다.
밤이 되자 한 번 더 후회가 격렬해졌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그 장면이 떠오르고, 내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괜히 말했어. 그냥 참을걸. 그건 정말 내가 감정적이었던 거잖아.”
“다시는 저런 말 하지 말자.”
“근데… 내가 정말 틀렸던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말하지 말 걸. 아니,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날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또 다른 의미를 덧씌워서 며칠을 고민했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나였다. 나는 너무 쉽게 부서지고, 너무 자주 흔들렸다. 누군가에겐 그냥 스치는 말 한마디가, 나에겐 몇 날 며칠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음에도, 감정이 안으로 차오르면 나는 또 입을 열었다. 말을 삼키지 못했다. 어쩌면 그건 누군가와 솔직히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었고, 내 감정을 함께 들여다봐 달라는 외침이었는데. 돌아오는 건 자책과 후회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한 말이 나를 후벼 판다. 나는 대화를 건네고서 오히려 상처받는다. 화살을 쏜 내가, 그 튕겨온 화살에 찔려 괜히 하루 종일 멍해지고, 문득문득 그 대화가 떠오르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앞에 없는 상대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괜한 눈치를 본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을 꺼내기 전, 열두 번쯤 속으로 뱉어본다. 그다음엔 두 번쯤 씹어보고, 마지막엔 그냥 삼켜버리는 날이 더 많다. 누가 보면 참 조용하고 무던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건 말 한마디에 며칠씩 무너지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다.
그러나 말은 이성의 말을 참 듣지 않는다. 감정의 노예임이 틀림이 없다.
해서, 결론은 늘 같다.
말하지 말 걸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