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함께
하루키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
그는 초창기에 인물의 이름을 정하는 게 어려웠다고 한다.
(이 소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가 캐릭터를 만들 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
너무 평범하면 재미가 없고
너무 신비하면 현실성이 없다.
놀랍게도 그의 소설에는
어딘가 있을 것 같은데,
신비한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하다가
끝에 가면 ‘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상실에 대한
고통과 극복은 사실 뻔해 보이는 주제지만
그는 뻔하지 않게 돌아 돌아
그곳까지 간다.
사실 사랑은 뭐다. 인생은 뭐다.
이렇게 직설적인 정의를 바란다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소설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처럼 있는 감정들을 굳이 정의 내리지 않고 흘러가듯 아무렇게나 이야기한다.
100명의 독자가 있다면
100명의 정의가 있는 셈이다.
그것이 소설이 주는 묘미가 아닐까.
초창기에 일본 문학계에서는
하루키 소설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순문학이 뭔지 대중문학이 뭔지 배운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독자로써 감상만이 있을 뿐이다.
전문적 지식은 때때로 삶을 방해한다.
본업에서는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 소설을 읽거나 만화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럴 때는 제멋대로 구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런데 재밌어서 하던 것도 하다 보면 관심이 생기니까
잘하고 싶고 더 깊게 알고 싶어 지니 공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 더 넓게 보이니까 그것대로 장점이 있다.
아무튼 결론이 뭐냐면 돈 받고 하는 일 아니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마음 편하다는 거다.
하루키 책을 읽고 어쩌다가 이런 의식의 흐름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하루키가 쓴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 그의 삶을 조금은 알게 됐다.
그는 학교 공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아내와 결혼 후 재즈 카페를 운영하며 열심히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서른 살을 앞둔 그는 진구장에서 한가롭게 맥주를 마시며 야쿠르트 개막전을 보다가 문득 소설을 쓰자 마음먹는다.
그에게 직접 듣진 못했지만,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판은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재즈 카페를 하며 글을 쓰고 싶어서 썼는데 처음부터 그런 걸 걱정했다면 본인만의 문체나 작품이 나오긴 힘들지 않았을까.
요즘 웹툰과 만화책을 달고 살다 보니 1차원적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지만, 소설만의 매력도 느끼니 기분 좋은 하루다.
아무튼 재밌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