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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삶 Oct 30. 2018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나의 첫 해

쉽지않아요..

결혼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는 결혼 2년차, 아이 엄마, 20대 후반 한국인 여성.


긴 연애 이후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당시 직장인이었던 나는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현재 남편이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때의 나에게 결혼은 무엇보다도 길고 긴 연애를 성공적인 끝맺음했다는 의미로 굉장히 속 시원한 어떤 것으로 다가왔었고, 결혼과 동시에 거의 30년 가까이 살던 나라를 떠나 머나먼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사실은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하고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을 때의 지인들의 반응은 거의가 비슷했다. 너무 부럽다고. 그 때엔 수줍게 웃고 넘겼던 그 부럽다는 인사에 대해 미국에서 산지 1년이 훌쩍 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대답할 수 있다면 ‘아니, 난 한국에서도 결혼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당신들이 더 부럽다’고, 혹은 ‘어디에서 사는지가 중요한가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요.’ 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하고 며칠 뒤, 출국 몇 시간 전에 공항에서 나는 가족 친척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 때에 잘 다녀오라며 이야기하던 아빠의 목소리 이후에 갑자기 적막과 함께 크게 울먹이시던 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래도 남편이 함께 있어 기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었었다.


미국에서의 삶은 하나부터 열까지 적응해야할 것 투성이었고 마치 대학교 이후 누구도 친절하게 손을 먼저 내밀지 않았던, 냉랭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때보다도 차가웠다. 아무리 미국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살 권리가 있다고 해도 굉장히 기본적인 것부터 어렵게 얻어내야 하는 생활이었다. 내 비자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비자였다. (보통 미국에서 일 하고 있는 외국인의 배우자에게 주는 비자이다. H4비자)


그렇기 때문에 미국 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credit 은 없는 상태, 돈을 벌 수도 없는 상태, 나는 그저 거주만이 허락된 상태.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도 어렵고,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면허 시험을 보기 위한 자격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편이 주위 지인들에게 묻고 물어서 우리의 거주지에 내 이름을 추가하고, 그렇게 가스, 전기 비용 고지서에 내 이름을 추가하고, 한 두 달 후 집으로 온 고지서 두,세 개를 가지고 가서야 debit 카드 (한국에서의 체크카드)를 만들 수 있었고, 그런 고지서를 또 몇 개 들고 가서야 겨우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어렵게 얻은 내 미국 운전면허


특정 사회에 속하기 위해 필요한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 나에게는 하나하나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내 정체성에 대해 내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근 30년간 차곡차곡 쌓아왔던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없어진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나를 친구처럼, 동료처럼, 혹은 선 후배처럼 대하던 내가 원래는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관계들이 미국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없었다. 나를 나로 알아주고 사소한 안부라도 건네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남편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저 어떤 ‘아시안 외국 여자’에 불과했다.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보니 만나는 사람들의 범주도 쉽사리 넓혀지지 않았고 어디를 가나 한국에서처럼 그런 얕은 인간관계라도 만들기는 어려웠다.

반면 남편은 미국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나보다는 훨씬 완숙된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구나 아는 실리콘밸리의 큰 회사에서 업무에 익숙해져가고 동료들과 친근해져가고 가정이 생기면서 한층 안정되어 보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 것 같았다. 나도 남편처럼 나름 재미있게 회사를 다녔었는데.. 야근없이 매일의 칼퇴 후에 친구들과 만나며 삶을 나누고 미래의 꿈을 꾸었는데.. 결혼해서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이 너무 좋은데 한편으로는 갑자기 변해버리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금문교


그제서야 점점 내가 너무 미국에서 사는 결정을 쉽게 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결혼 당시에는 어렵게 고민해서 내렸다고 판단했던 그 결정이 미국에 와서 돌아보니 정말 생각없이 했던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무를 수도, 이렇게 손 놓은 채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평생을 이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남편의 지인들을 만나도 나는 나 본래의 모습보다는 내 남편 000의 와이프로 받아들여졌고,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은 내 주위의 어떤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 생긴 느낌이었다. IT회사의 기획팀의 나, 부모님의 딸 나, 키 크고 커피 좋아하는 친구였던 나, 히히덕거리고 농담하기 좋아하는 친구인 나, 주위에서 나를 생각했을때 여러 특징의 다채로웠던 나는 미국에 도착한 순간 사라졌고 나는 그저 이름 모르는 어떤 외국인이 되어버렸다. 내 생각, 행동, 존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고 그것이 내가 미국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과 나는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렵고 거친 미국 사회에서 의지할 수 있는 상대와 함께 살고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한국보다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남편의 퇴근 이후에 함께 저녁을 먹고 하루를 이야기하며 매일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이 잠들고 난 새벽에 가끔 잠이 오지 않을때면 혼자가 된 듯한 차갑고 시린 외로움이 찾아와, 그리고 지금과 크게 변화가 없을 것 같은 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남편이 깨지 않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던 날도 참 많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런 내 상황을 곁에서 느꼈던 남편은 지금도 그때의 일을 말하면 눈이 빨게지며 나를 쓰다듬곤 한다. 신혼 초에는 다투다가도 갑자기 미국에 와서 사는 내 처지가 문득 짠한지 남편이 펑펑 울어서 내가 당황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쨌든 그 때를 되돌아보면 겨우 작년의 일이지만 내 자신이 너무 서럽고 짠하다. 그때의 나를 찾아가 안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었고, 내 삶의 평가를 위한 기준과 잣대를 바꾸었으며, 내가 생각하는 하루 하루의 우선순위를 이 전과 다르게 내 미국에서의 삶에 맞게 재정렬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임신, 출산을 하고 아기를 키우면서 이 삶에 뭉개지지 않게 나를 꽉 잡으며 적응하며 커가고 있다.

요즈음엔 내 주위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든, 일이든 무언가를 잡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심심치않게 본다. 모국이 아닌 곳에서의 생활을 실제로 살아내는 그 삶에는 화려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외로움과 아픔, 서러움이 함께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에 오르는 그 용기있는 삶을 응원한다.

어디에서 살든 그 누구든 삶이 어떻게 쉽겠냐만은 그래도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 위한 바둥거림이 산다는 것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게 되는 그런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외국에서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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