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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율 Nov 20. 2021

하루라도 욱하지 않았으면(1)

1. 마음속 '되지 세 마리' 키우기

대학교에서 보육을 전공했다 하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아기 좋아하나 보다.”


맞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기를 참 좋아했다.

부모님 지인들의 자녀가 태어나면

신생아실에 찾아갈 정도로,

놀아주겠다고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다녔을 정도다.

두 명이 아니라 매년 나에게는

그런 ‘아기’가 있었다.

다음으로 나오는 말은 식상하게도 거의 비슷했다.


“남의 자식을 그렇게 예뻐하면

  네 아기는 얼마나 예뻐할까?”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아기 안 낳을 거예요!”


이유는 분명했다.

모든 여자들이 무서워하는

출산의 고통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혈액형도 rh-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매우 안전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술은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고, 자연분만은 더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남편과 연애할 때도 처음부터

나는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 선언했고,

나만큼이나 아기를 좋아하던 남편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결혼식을 막 끝내고 난 이후

마음 한편이 울렁거렸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이라 치부했지만

밤이 되어서도 이상한 느낌은 여전했다.

나는 주로 생각보다 몸이 먼저 요구하는 것이 생기면 뒤늦게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기는 편이었는데,

그날도 몸의 이상반응 원인을

추리해내느라 꽤 고민했다.

그리고 첫날 밤, 호텔에서 와인을 마시기 전 남편의 축사를 듣고 나는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화창한 신혼생활을 위하여!”

“아기 태명은 화창이로 하자!”


평소에도 자주 보던

‘이 여자가 또 헛소리를 하네’라는 남편의 표정.


“나 아기가 갖고 싶어. 자기를 닮은 아기.”


나중에 유추한 것이지만,

갑작스러운 아기에 대한 열망은

결혼식 사전 영상을 만들기 위해 자주 들여다보던

남편의 어렸을 적 사진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몇 천배 귀여운 얼굴과 표정의 아기를

직접 만지고 안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깊이 자리했고,

이 아기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하다

결국 임신에 닿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 길로 아기를 갖기 위해,

정확히는 남편의 귀여운 모습을 보기 위해

임신을 준비했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3번의 실패 후 모든 걸 내려놓자

4번째 시도만에 화창이를 만나게 되었다.


우여곡절 없는 임신이 있겠냐마는

나름대로 입덧도 없었고,  

허리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신기하게도 요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드라마틱한 일은

출산 이후 알게 되었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던 63가지의 알러지가 2개로 줄어드는 마법을 경험했다.

나에게 화창이는 말 그대로 축복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예쁜 짓만 골라서 하던 화창이는

세상에 나와 첫울음을 터트리며

평생 아기는 갖지 않겠다던 이기적인 여자에게서

목숨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모든 엄마들에게 자식이 그렇듯

화창이도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이 18개월이 흘렀다.

소위 엄마들 사이에서 

‘아기가 뒤집어지는 시기’라 불리는

원더윅스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하지 말라면 안 하고 하라면 하는

말 잘 듣는 아기였다.


그런데 돌이 지나고부터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고집이 생기더니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일단 드러누워버리는 아기가 되었다.

소리 지르지 않고 우아하게 육아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우악스러운 엄마에 가까워졌다.


평소에는 생떼를 부려도 상황을 전환해주면

환기도 잘 되고, 겁이 많은 아이였는데,

어김없이 원더윅스가 찾아오면 생떼가 심해지고,

위험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등

나는 하루 종일 “안돼”, “하지 마”, “그만해”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


‘아, 이래서 임신했을 때가 편하다 하는구나.’

임신 중에는 하루라도 빨리 화창이의 얼굴을 보고, 만지고, 안아주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이제 겨우 18개월 산 아이를 두고

과거를 떠올리며,

선배 엄마들의 충고 아닌 충고가 그리워지려고 하는 나를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앞으로 이 아이와 적어도 18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고작 18개월 지내놓고 벌써 지칠 수는 없었다.

화창이가 태어나던 날, 평생을 바쳐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나를 찾아야 했다.

그때 그 마음을 다시 새기고, 새겨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청개구리처럼 반대로만 하는 아이를 붙들고

엄마가 너무 힘드니 엄마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해볼까,

이렇게 엄마 괴롭히면 혼내준다고 협박을 해볼까 별별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내 말을 이해할 리 만무한 아이에게

어떤 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내 지친 마음이 아이의 눈에 비쳐

이 어린아이가

‘차라리 뱃속에 있었을 때가 좋았다’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것만은 제발.


이대로는 안된다.

매일같이 소리 지르고, 화내고, 욕하며

이 소중한 아이와의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남편이 ‘남의 편’이 되듯 사랑스러운 자식이 ‘이놈의 자식’이 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일단 아이가 가장 ‘이놈의 자식’이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았다.

내 경우에는 하루에 4~5번 찾아오는 식사시간이었다.


화창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큰 아이였음에도

밥을 정말 안 먹었다.

신생아 때부터 뱃고래가 작아서 남들보다 적은 양을 여러 차례 나눠먹여야 했다.

그때는 신생아가 배부르면 그만 을 줄 안다며 스스로 양을 조절한다고 기특해했는데

유아식을 먹을 때까지 그럴 줄이야.


몇 숟갈 먹다 장난치고, 뱉어내고, 식사시간인지 촉감놀이 시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 시간을 견디고, 버티고, 인내해야 했다. 

먹는 양보다 버리는 양이 더 많은데

도대체 1등급 한우를 왜 사 먹여야 하며,

유기농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재료값을 생각하면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이게 얼마짜리인 줄이나 알고

  그렇게 바닥에 집어던지는 거야?”

하며 말도 안 되는 싸구려 야단을 친 적도 있다.

식사시간만 되면 나는

아이에게 최악의 엄마가 되었다.

처음 이유식을 만들어 먹일 때는 앞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식사시간을 만들어주겠다 약속했는데, 이제는 그게 가능이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 나는 무능력한 엄마야.

수많은 육아 관련 도서와 영상에서 식사예절이나 올바른 식습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육학과를 졸업했지만 이론과는 동떨어진

눈앞의 신난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물론 식탁의자에 앉아 손에 수저를 쥐고, 

얌전히 식사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훌륭한 엄마들도 많겠지만

나는 무능력한 엄마였다.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다.


꼼수 좀 부려보자.

내가 무능력해서 아이의 행동을 수정할 수 없다면

그나마 바꾸기 쉬운 내 마음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다행히 어린이집에서는 친구들을 따라

순순히 밥을 먹는 아이라고 하니

나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지 않을까 꼼수를 부려보기로 했다.

‘어린이집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나에게 푸는 거다. 얼마나 재밌겠어,

나이 때는 음식을 가지고 노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하며, 나를 세뇌시켰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몸을 벌벌 떨며

놀라는 연기를 하는 아이를 보고

‘나 또 화를 냈구나.’싶어 이내 미안하다 사과했다.


이 정도의 이해심 밖에 없는 엄마라니.

한숨을 쉬며 아이가 던져놓은 밥과 반찬들을

닦고 있었다.

내 마음도 이렇게 깨끗하게 닦을 수만 있다면.

어? 그래, 그냥 닦으면 되는 거잖아?


흘린 건 닦으면 되고, 떨어뜨린 건 주우면 되고, 더러워진 건 빨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나 간단한 문제였다니.

머리카락이 밥풀로 범벅이 되었다면 그저

씻기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밥풀을 떼며 득도를 한 그날 이후로

나는 식사시간만 되면 ‘되지 세 마리’를 불러온다.


"닦으면 되지, 치우면 되지, 씻기면 되지"


이 되지 세 마리만 있으면

아이가 아무리 집안을 휘저어 놓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래, 어지를 만큼 마음껏 어지르렴.

네가 잘 때 치워놓으면 되지.

아이는 어지르는 게 놀이고,

어지르라고 사준 장난감이고 책이잖니.


가끔 손으로 밥을 잔뜩 쥐고 이리저리 흔들다 날아오르는 밥풀과 눈이 마주치더라도

예전 같으면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이제는 ‘되지 세 마리’와 함께 입을 다문 채 콧구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밥은 입에 넣어서 꼭꼭 씹어 먹는 거야.”라고 차분히 이야기해줄 수 있다.

이런 나 자신을 보면 약간은 우아한 엄마에

다가간 것 같아 날아가는 밥풀과 함께

내 기분도 살짝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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