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율 Dec 20. 2021

화창이가 그린 그림


지난겨울에는 이사를 했어요. 엄마가 이제는 마음껏 놀고 벽에 낙서를 해도 괜찮다 하시더니 씩 웃으시네요. 엄마, 아빠의 기분이 좋아 보여요. 덩달아 저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1월은 노란색으로 칠할래요.


봄이에요. 4월과 5월에는 좋은 날이 많다고 엄마가 한껏 들떠 계세요. 4월에는 엄마, 아빠가 처음으로 맞은 결혼기념일이 있고, 5월에는 저의 첫 번째 생일이 있대요. 결혼이라는 걸 해서 엄마, 아빠가 저의 엄마와 아빠가 되신 건가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축하해요!

엄마는 저의 생일파티를 준비하시느라 바쁘다며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네모 모양 장난감을 붙잡고 계시네요. 저는 생일파티보다 엄마랑 신나게 놀고 싶은데 생일이라는 건 꼭 멋진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날인가 봐요.

아참, 그리고 ‘첫 돌’이라고 적힌 떡과 케이크가 빠지면 안 된다고 엄마가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무엇이든 처음으로 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것인가 봐요. 제가 엄마, 아빠의 첫 번째 아이인 것만큼 요.

벚꽃이 피고 질 때까지 엄마의 기분은 벚꽃처럼 화사하고 기뻐 보여요. 매년 봄은 이렇게 분홍빛이겠죠?


여름이 왔어요. 엄마는 저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아무 곳도 갈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바다는 좀 더 크면 보여주겠다 하시면서 매일매일 집에서 물놀이를 할 거래요. 엄마! 저는 바다라는 것보다 이렇게 엄마랑 집에서 물장난하는 것도 매우 좋다고 생각해요. 시원한 집에서 하는 첨벙첨벙 물장구는 정말 재미있네요. 엄마도 그런가요? 그럼 여름은 파란색으로 칠해 볼까요?


가을이에요. 아빠가 어쩐 일인지 회사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나랑 놀아줘요. 어?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집을 떠나 자동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 가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스르륵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정말 멋진 풍경이 펼쳐졌어요! 산이라는 것은 언제나 초록색인 줄 알았는데 빨간색, 노란색, 그리고 주황색 여러 가지 색깔로 누군가 예쁘게 칠해놓았네요. 우리 오늘은 수영장이 있는 이 집에서 잠을 자는 건가요? 저는 너무 신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튜브를 타보았지만 마치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물이 너무 좋아요. 마치 물속에서 살았던 것처럼요. 가을은 무슨 색으로 칠해야 할까요? 아까 산에서 보았던 것처럼 빨간색과 노란색, 주황색 크레파스를 집어 예쁘게 칠해볼게요.


또다시 겨울이 왔어요. 엄마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이 있나요? 사람들이 슬퍼하는 장소에 가는 것 같아요. 검은색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네요.

엄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가 엄마의 눈물을 닦아줄게요. 엄마가 너무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 겨울은 아무래도 검은색으로 칠해야겠어요. 엄마의 기분은 결국 저의 기분과 똑같거든요.



“화창이 그림 그리고 있었니?”

“네!”

“이건 무슨 그림이야? 온통 까맣게 칠해놓은 걸 보니 화창이가 좋아하는 김을 그린 거구나?”


아니에요! 이건 우리들의 일 년을 빼곡하게 칠해놓은 거예요.

빨간색,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 검은색까지 엄마의 기분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색깔의 크레파스로 칠해 놓으니 이렇게 김처럼 까만색이 되어버렸지 뭐예요.

우리는 매년 이렇게 까만 김 속에 살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것만은 알아주세요.

까맣게 보일지 모르는 우리의 일 년 안에는 기쁘고, 즐겁고, 슬픈 기억 모두 들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걸요. 그리고 모든 순간에 우리는 함께할 것이라는 걸요. 엄마, 오늘도 많이 많이 사랑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4. 올해의 나는 어떤 색이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