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산책하러 집을 나섰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저만치에 허리가 거의 ㄱ자로 굽어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나름대로 부지런히 걸으려 애쓰시는 것 같았지만 걸음과 걸음 사이 간격이 너무 작아 애쓰시는 것에 비해 속도는 나지 않았다. 저 걸음으로 목적지까지 언제 가실 수 있을까.
노년이 현실로 다가온 나이여서인지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남일 같지가 않았다. 나도 나이 들어 허리가 굽으면 어쩌나. 굽은 허리로는 장보기도 밥하기도 설거지 하기도 어려울텐데. 혼자 씻는건 가능하긴 할까. 혹시 치매가 오면 어떡하지. 다가오지 않은 나의 노년이 벌써부터 무섭다.
"저 할머니처럼 허리가 굽으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지?"
입 밖으로 튀어나온 두려움은 남편에게 하는 질문이 되었다.
"적응하며 사는거지 뭐."
어지간히 아프지 않고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남편은 정해진 대답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 뒤로 변성기로 목소리가 특이해진 남자아이 여럿이 큰소리로 장난치며 지나가는 모습은 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대조되는 다른 세상 사람들 같다.
비문증이 오고 손가락을 비롯해 관절 여기저기가 아파 몸에서 진행되는 노화를 실감하는 나이가 되니 진시황이 왜 그리 불로장생을 염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작 마흔 중반인데 너무 호들갑 떠는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도 가능하다면 노화를 더디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간절하게.
100세 시대라는 말이 흔해졌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여성의 기대수명은 86세로 꽤 높다. 이는 평균수치이니 건강 관리를 잘 한다면 90세는 물론이거니와 100세까지 사는 게 드물지 않은 세상이다. 오늘 아침 성당 단톡방에서 받은 교우 선종 소식은 무려 101세 자매님의 부고였다. 그 전에도 때때로 전해지는 선종 소식에는 90세가 넘은 분들도 적지 않았다.
오래 산다는 건 마냥 좋은 일일까. 전부터 100세 시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 그저 막연한 거부감이었고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동네를 자주 걸어다니는 요즘 생활복을 입고 재잘거리며 근심걱정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자주 마주치다보니 거부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치매에 걸린 채로 수십 년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치아가 부실해져 물렁한 음식만 씹을 수 있고 귀가 어두워져 보청기에 의지해야 하며 지팡이 없이 혼자 걷기 힘든 상태로도 굳이 오래 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생명이 늘어난다면 이런 삶을 오래 사는게 아니라 좀더 명랑하게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나이가 길어져야 하지 않을까. 내 거부감이 가리키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노화가 시작되는 나이가 어느 책에서는 스물 다섯 살이라고 한 것 같고 다른 책에서는 그보다 조금 많았던 것 같다. 생각보다 빨리 노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에 놀랐었는데, 이 시점을 늦추거나 노화가 지금보다 열배 쯤 느리게 진행되게 만들어야 생명연장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런 배분은 어떨까. 100세를 기준으로 할 때 청소년기는 그대로 두고 청년이라는 기준은 예순 살 정도에서 그리고 중년은 여든 살에서 끝나고 나머지 이십 년 동안만 할머니 할아버지로 사는 삶. 청춘이라는 시기가 상대적으로 더 길고 노년이 짧을 수 있다면 그땐 생명연장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 노화가 조금은 천천히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마흔 중반이 되어서야 배움의 즐거움을 깨달았는데 청춘이 지난 몸으로는 악기든 운동이든 무엇 하나 쉽게 배울 수가 없어 힘들고 속상하다. 불로장생도 100세도 바라지 않으니 지금보다 하루씩만 더디 늙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