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공항에서 만난 짧은 인연

by 단미

브리즈번 공항에서 수하물이 나오길 기다린지 한 시간 가까이 되었다. 꼬불꼬불 이어진 입국심사 줄은 1km 정도 되어보였다. 화장실은 급한데 홀로 여행을 왔기에 짐을 맡아줄 이도 없고 나가기 바쁜 상황에 누군가에게 내 짐을 맡느라 기다려달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일단 나가자.'


다행이 입국심사 줄은 처음보다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빨리 나왔지만 현지 유심을 파는 optus 통신사 가게 앞엔 이미 또 줄을 서 있었다. 잽싸게 카트를 끌고 꽁무니에 붙어 서 있자니 반가운 한국말이 들린다. 깨끗한 목소리와 상냥한 말투의 주인공을 찾아 보니 수수한 차림에 꽤 어린 분이다. 참고 참았던 화장실을 더는 미룰 수 없어 그 분에게 잠시 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유심 가게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유심 구매 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분과 나는 기다리는 동안 간간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함께 유심을 샀다. 그 분은 나처럼 에어트레인을 타고 시내로 이동할 것이며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처음 왔다고 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어린 나이가 부러우면서도 친구도 없이 홀로 낯선 땅을 밟은 그 당참에 감탄했다. 이런 상황이면 늘 겪는 마음의 소용돌이. 아무 성과와 소득없이 보낸 허무하기 짝이 없는 나의 이십 대. 깊은 후회와 아쉬움 끝에 이제는 괜찮아졌다 생각하지만 지금처럼 갑자기 도화선이 당겨지면 마음이 움찔한다.





"오늘은 뭐할거에요?"

"시내에서 은행 계좌 먼저 만들려고요."


일할 곳도, 숙소도 아직 정해지지 않아 허공에 붕 뜬 상태지만 걱정이 많아보이지는 않았다. 호주로 건너오기 전 한국에서 나름대로 차근차근 준비를 잘 한 야무진 아가씨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일은 있는 법. 내 동생도 호주 오기 전 충분히 준비를 한다고 하였지만 숙소 사장이 아들 여자친구를 뺏으려한 파렴치한 사람임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요즘처럼 개인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사장은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기 아주 쉬웠고, 한국에서는 그 사정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내 동생이 겪은 이런저런 나쁜 이야기를 그녀에게 시시콜콜하지는 않았다. 단지 당찬 도전이 겁먹음으로 꺾이기보다 적당한 경계를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한국 사람 등쳐먹는 한국 사람 많으니 조심하라고. 어린 나이에 도움 청할 어른 하나 없이 머나먼 나라에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은 피하는게 좋으니 말이다.


이왕 호주로 온 김에 즐거운 기억을 만들면 두고두고 좋을 것이다. 처음 뉴질랜드 퀸즈타운 공항에 내렸을 때 공항을 둘러싼 자연 풍경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은 것처럼.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던 그 날을 떠올리며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뉴질랜드 남섬에 놀러가보라고 하였다. 호주도 물론 좋지만 뉴질랜드 남섬은 북섬 사람들도 관광하러 가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에어트레인에서 나보다 한참 전에 먼저 내리는 그녀는 이렇게 만난 인연을 기념하여 사진 한장 찍자고 하였다. 밤비행기를 타고 와서 후줄근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기꺼이 환한 표정으로 응했고, 서로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은 우리는 그렇게 사진 한 장을 남긴 채 헤어졌다.


"잘 살아요!"


큰 용기를 안고 떠난 만큼 호주에서 머무는 동안 단단하고 성숙해진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씩씩하게 내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괜스레 마음이 울컥하였다.잠시 만난 인연이었지만 어찌하여 가족을 떠나보내는 느낌인건지.


우리가 아주 우연히 호주 브리즈번에서 또 마주칠 수 있을까. 어쩌면 유일하게 우리의 흔적을 남긴 사진을 온라인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기억 속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져있을까. 그녀는 나의 바람대로 멋진 시간을 보냈을까. 그 때 내 마음은 어떨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