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을 코앞에 두고 해마다 어김없이 하는 그 일이 찾아왔다.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편지쓰기.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90년 겨울에도 담임선생님은 다음날까지 위문편지 쓰기라는 비공식 숙제를 내주셨다.
봄에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열리고, 가을엔 같은 주제로 웅변 대회가 열리던 시대였다.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나라를 지키는 고마운 국군 장병 아저씨들에게 강제로 위문 편지를 쓰게 한 건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 정확하지는 않지만, 글씨를 쓸 수 있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나이면 무조건 써야 했던 것 같다. 아마도 3학년쯤부터?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강원도 양구는 어린 내가 느끼기에 군인이 절반, 주민이 절반인 마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금빛 장신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시커먼 얼굴을 반쯤 가린 철모 아래 무서운 표정을 한 채 열을 맞춰 딱딱하게 걷는 군인 무리를 만나는 건 흔했다.
어딜 가나 군인 아저씨들이 있었고 직업이 군인인 아버지를 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래서 군인이라는 존재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친근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을 구성원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리 군인 아저씨들을 흔하게 본다 해도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을 향해 편지를 쓰는 일은 고역이었다. 국민학생에 지나지 않는 어린아이가 ‘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분들’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정보가 없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숙제는 해야 했다. 안 쓰면 매를 맞든가 벌을 받든가 그도 아니면 반 친구들 앞에서 호되게 야단맞을 게 분명했다. 미루고 미루다 잘 시간이 다가오자 마지못해 연필을 잡았다.
‘국군 장병 아저씨께.
안녕하세요. 저는 양구국민학교 6학년 4반 김혜진입니다.’
한 줄짜리 자기소개를 끝내고 나니 연필이 멈췄다. 할 얘기가 없다. 대체 군인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한담.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들을 떠올려 보지만 그들이 글쓰기 영감을 제공해 주지는 않았다. 딱히 쓸 말이 없으니 미적거리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다 학교생활이 어떤지 간신히 몇 줄 썼던 것 같다.
‘두 장이나 썼네. 이 정도면 됐겠지.’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에 위문편지를 제출했다. 무려 두 장이나 썼으니 혼나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조금 있었고 마음은 아주 홀가분했다.
그런데 종례 시간이 되자 이미 기억에서 지운 위문편지가 다시 호출되었다. 모든 편지를 검토하신 담임선생님이 성의 없게 써온 친구들이 많다며 잔소리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반쯤 졸며 편지를 쓴 나는 제 발이 저려 고개도 못 들고 성의 없는 대표선수로 나를 부르시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재밌게 쓴 편지 하나 읽어줄 테니 잘 들어봐.”
잔소리 끝에 선생님은 누군가를 혼내는 대신 어느 편지를 읽어주셨다. 단체로 혼이 난 우리는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편지에 귀 기울였고, 학교생활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듯 써 내려간 편지에 감탄했다.
선생님은 이 편지를 쓴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으셨다. 글쓴이를 칭찬하기보다 좋은 사례로서 들려주려는 의도였겠지. 편지가 끝나갈 때쯤 나는 편지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졸면서 쓰긴 했어도 희미한 기억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건 내가 쓴게 분명했다. 아무말 대잔치인 줄 알았던 내 편지가 뜻밖에 잘 쓴 글로 소개되다니. 정성껏 쓰지 않았음에도 칭찬을 듣게 되어 부끄러웠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 편지 속 주인공이 나라는 걸 친구들에게 자랑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생각지도 못하게 군인 아저씨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내 편지가 힘든 군 생활에 작은 위로가 되었던 걸까? 물론 내가 다시 편지를 쓰지는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황소 뒷걸음치다 쥐잡듯 어쩌다 재밌게 쓴 편지를 흉내 낼 수 없는 까닭이다. 오지 않는 편지에 군인 아저씨가 실망했어도 없는 글솜씨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니 부디 나를 금방 잊으셨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