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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미 Oct 25. 2023

그대 이름은 이면지

‘이면지 사용 금지’


사무실 복합프린터 앞에 누군가 써붙여놓았다. 뜨끔한 마음. 나 때문인가? 지레 찔린다.


출판 에이전시 회사라 출력하는 일이 잦다. 교정 업무를 위한 출력일 때는 한 번에 수십 장을 인쇄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경험상 대부분의 경우 출력된 많은 종이 중에 낙서나 메모 없이 깨끗한 채로 버려지는 종이가 그렇지 않은 종이보다 많다. 한 면이 인쇄되긴 했어도 뒷면이 깨끗한 종이를 그냥 버리는 건 여간 마음 불편한 일이 아니다. 몇 번을 버리다 결국 차곡차곡 모아두고 다음 인쇄 때 뒷면을 사용해본다. 복합프린터 기능에는 양면 인쇄 메뉴가 있어서 그렇게 사용해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면지를 부러 사용한 경우에는 용지걸림 현상이 제법 생기는게 아닌가.


‘삐삐삐삐 -’


용지가 걸렸다는 경고음이 울리면 이면지를 사용한 범인인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종이함을 꺼내고 카트리지를 열어 그 사이에 낀 종이를 살살 빼낸다. 그렇게해서 해결이 되면 다행이지만 직접 해결할 수 없는 경우, 이를테면 종이가 손이 닿지 않는 부분에 끼어서 기계 전체를 열어야하는 난처한 상황도 종종 생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A/S를 신청하고 기사님을 기다려야한다. 기사님이 도착하여 복합프린터에 낀 종이를 데려갈 때까지 출력은 물론 팩스를 주고받을 수도, 스캔을 할 수도 없다.


‘괜히 이면지를 사용했나….’


안절부절하게 되는 상황을 몇 번 겪고 나니 이제는 출력할 때 이면지를 사용하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데 범인은 나말고도 여럿 있었는지 결국 단면 인쇄만 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이다. 이면지를 활용한답시고 종이가 걸리면 수리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낭비되고 기사님 출장 비용 등이 생기는데, 이 모든 비용보다 종이값이 더 싸다는 것이 지침을 내린 분의 지론이다. 그러니 굳이 이면지를 사용하느라 애쓰지말고 깔끔하게 단면만 쓰고 버리라는 것. 깨끗한 종이를 재활용하지 못해 안타깝지만 A/S 기사님을 부르게 만든 당사자로서 감히 딴지를 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단면 인쇄만 한 종이를 그대로 버릴 수는 없는 노릇. 깨끗한 종이는 수거해서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출력을 하지 못하니 딱히 쓸 용도가 없어 반씩 접은 후 잘라 업무용 노트로 쓴다. 그런데 사용하는 속도보다 이면지가 생기는 속도가 더 빠르다보니 모아둔 이면지가 A4 몇 권 분량이다. 저장강박증이 있는게 아니냐며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처분을 기다리며 한 구석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이면지들을 보노라면 울고 있는 아이를 본 듯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집으로 적잖이 가져오기도 했다. 집에서 인쇄할 때만큼이라도 구겨지지 않은 깨끗한 이면지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딴에는 새 종이를 사는 비용도 아끼고 버려지는 종이는 재활용하는 것이니 일석이조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니겠냐는 취지다. 집에서는 프린터를 혼자 쓰기에 용지가 걸려도 다음 사람이 출력하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용지걸림과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비교하며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도 없다. 모아온 이면지를 가로로 탁탁, 세로로 탁탁 여러 번 정돈해서 한 장 한 장 출력한다. 쓸 수 있는데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시간이 좀 걸려도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며칠 전에는 회사에서 A4도 B5도 아닌 어정쩡한 크기의 종이를 한보따리 갖고왔다. 심지어 이면지도 아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 종이들은 제 역할을 다 했다고 한다. 보나마나 폐종이들과 함께 그대로 버려질 게 뻔했다. 양이 적지 않아 저건 또 언제 쓰나 싶지만 모른 척하지 않길 잘 했다는 생각이다.


종이책을 사랑하지만 책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야하는 사실은 마음이 아프다. 내가 사용하는 종이가 어디 책만들 때 뿐이랴. 종이컵, 화장지, 포장용기, 택배 박스…. 하루에 사용하는 종이 양만 해도 적지 않다. A4 종이 1만장을 만드는데 30년된 나무 한 그루가 든다고 하니 내가 이면지를 사용하면 나무를 조금 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오늘도 나는 이면지를 챙겨온다.


버려질 운명이면서도 소중하기도 한 그대 이름은 이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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