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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의 세상 Oct 17. 2020

[강릉여행上] 고요할 권리

"이것은 잠봉뵈르를 먹으며  끄적인 것이다."


그랑자트 섬의 주문진해변이다.

  

 9월이 되어서야 늦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목적지는 강릉. 북적이는 서울을 벗어나, 마냥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태풍이 막 지나간 터라, 이 시기에 여행 가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선택한 목적지였다. 도착한 날은 날씨가 정말 맑았다. 푸른 하늘이 아직 여름이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빛났다. 덕분에 늦은 바캉스를 떠나온 기분이었다. 휴식이 아닌 휴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하늘. 의도치 않게 어딘가 들뜨게 만드는 하늘이었다. 첫째 날은 호텔 테라스에서 혼자 하늘을 멍하니 보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내도 충분했다. 높은 하늘에 막힘없는 지평선이 어느 엽서의 저편처럼 아름다웠다.




 맑은 하늘과의 밀회를 누군가 시샘한 것일까. 둘째 날 하늘은 변덕이 심했다. 어제의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흐린 구름이 강릉을 고요히 감싸고 있었다. 내심 기뻤다. 어제처럼 들뜨진 않았지만, 비로소, 온전히 혼자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은 교통사고 진단서로 비유할 수만 있다면 아마 전치 8주는 거뜬히 나올 만큼, 일과 사람에 치어있었다. 따라서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요함이 더없이 반가웠다. 혼자 침잠하기 좋은, 평화로운 날씨였다.


 날씨 생각도 잠시, 아침을 거른 탓에 금세 허기가 찾아왔다. 나는 초록창에서 강릉 동네 카페를 뒤적거렸다. 프랑스식 잠봉뵈르를 파는 브런치 카페. 차분한 비주얼과 처음 듣는 샌드위치 이름에 이끌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 차로 달리길 30분. 주말이라 한적한 한 골목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니 내가 첫 손님인 듯 보였다. 첫 손님만이 누릴 수 있는 적막함. 이따금 들리는 사장님의 빵 만드는 소리가 어느 사찰의 풍경소리처럼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고요한 평화의 나라에 온 유일한 손님 같았다. 나는 검색했을 때 처음 본 메뉴를 마치 몇 년 된 단골인 것처럼 능숙하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봉뵈르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박준의 끄적임"


  잠봉뵈르, 저민 햄과 버터라는 뜻의 샌드위치. 먼 타국의 음식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와그작 소리와 빵 굽는 소리, 고요함까지 빼닮은 맛이었다. 다만,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사장님과 나 사이의 적막함을 깰까 괜히 조심스러웠다. 그 적막함조차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딸랑. 한 커플이 까르르 하는 웃음과 함께 들어왔다. 혼자만의 시간이 끝났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메뉴를 고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두 남녀의 소리로 카페는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딸랑딸랑. 뒤이어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들어왔다. 학부모 모임이라도 하러 온 것일까, 아주머니들의 말소리에 카페는 이내 떠들썩해졌다. 그 순간엔  적어도 이 카페에서의 고요한 평화는 끝이 났구나 싶었다. 빵을 다 먹고 책이나 조용히 읽으려 했는데, 아쉽게 됐네. 라고 혼자 생각했다.


 카페는 좀 전의 고요함 대신에, 두 남녀의 말소리와, 사장님의 분주한 손놀림에 부딪히는 식기 소리, 아주머니들의 대화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떠들썩함에 묻혀 10분 정도가 지났다. 한데,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 이상한 행복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 나만의 고요한 적막이 깨졌음에도, 나는 도리어 약간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상한 행복함은 무엇일까. 사람에 치여 도망치듯 떠나온 강릉이었다. 근데 난 왜 굳이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왠지 모를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걸까. 여행을 떠나왔기에 사람들도 용서가 되는 걸까? 그럴 리가, 떠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 역시 꺼두고 싶을 만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럴까. 나는 왜 지금 사람들 속에서 행복한가.


 몇 번의 두리번거림 끝에,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워봤다. 그 가설은 이랬다. 지금은 비록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건 아닐까? 회사에서의 나는 사람들에 둘러 쌓여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기능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일을 처리하고, 보고를 올리고, 시간에 맞춰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하는 존재. 그곳에선 존재하기 위한 존재가 아닌 기능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곳에선, 떠들썩한 사람들의 소음 속에 묻혀 있어도 누구 하나 나에게 시간을 재촉하지도, 일을 요구하지도 않기에 나는 편안함을 느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비록 고요한 평화가 사라졌음에도 떠들썩한 행복감이 충만하게 차오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의 가설은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그래. 지금 나는 사람 냄새, 빵 냄새, 숨소리, 일상의 몸짓들 속에서, 비로소 나로서, 그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행복한 상태인 거다.


“좀 걸어야겠다…. 테이크 아웃해주세요!”


  수다를 떠느라 시켜놓은 샌드위치를 다 먹지 못했는지, 아주머니들은 남은 샌드위치를 포장하고 나서는 여고생들처럼 팔짱을 끼고 방울방울 웃으며 카페를 나갔다. 약속이라도 한 듯, 금세 커플들도 카페를 떠났다.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웃음과 함께. 카페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먼저 카페를 나간 이들을 한동안 바라보다 나도 좀 걷고 싶어졌다. 조금 걸으면서 저 사람들과 함께, 이 동네의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고 싶어졌다. 저도 테이크아웃해주세요. 나는 빵 봉지 하나를 달랑 들고 동네를 따라 흔들흔들 팔을 저으며 걸어봤다. 여전히 하늘은 흐렸지만, 날씨는 이상하게 솜이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걷는 소리, 멀어지는 웃음소리, 빵 봉투의 바스락거림.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오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었다.


20.09.06






p.s:

이것은 잠봉뵈르를 먹으며 끄적인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를 모를 권리”

평소엔 몰랐을 햇살로 시간을 가늠한다


메일을 보내야 할 시간

회의를 시작할 시간

보고를 올릴 시간

이런 시간들은

이곳에선 과거의 문명


이곳에선

몇 시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려보내도 될 권리


이곳은 시간의 치외법권.

시간이 넘볼 수 없는 곳

오직 내 마음만이 있는 곳



"오직 내 마음만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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