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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의 세상 Oct 17. 2020

[강릉여행 下] 300km/h의 인연들

우리의 속도는 빠르고 시간은 느리다

  

   오전 내내 카페에서 사람 냄새를 맡아서 일까. 혼자이고 싶었던 여행에도 작은 균열이 생겼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그 틈 사이로 나의 오랜 인연들이 끼어들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바다를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입사동기 쫑과 연락이 닿았다. 마침 내가 강릉으로 떠난다니, 갈까 말까 고민하기에 처음엔 내가 고사했었다. 무엇보다 출발하기 전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근데 오전 내에 생각이 바뀌었다. 나와 잘 맞는 친구 하나쯤은 함께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난 약간의 이기심으로 쫑에게 살짝 엄포를 놓았다. 나는 홀로 글이나 쓰며, 카페에서 노닥이는, 꽤나 심심한 하루를 보낼 건데 괜찮겠냐고 여러 번 되물었다. 쫑은 기분전환이면 무엇이든 좋다며 흔쾌히 말했다.


“그래? 난 바다 보면서 그림이나 그리지 뭐. 지금은 어디든 떠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뜻밖의 동행은 300km/h의 속도로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오후 1시 반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카페를 나와 산책하던 발걸음을 돌려 나는 강릉역으로 향했다. 평창올림픽을 치르느라 새로 지었다던 강릉역은 화려했다. 색색 조명이 홀 중앙을 강렬하게 비추고,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색이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강릉에 올 땐 늘 자가용을 이용했기에, 강릉역을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홀에 앉아 마스크를 꽉 쓰고는 시시각각 바뀌는 조명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를 10분. 서울에서 도착한 열차가 도착했다. 이윽고 열차에서 내린 쫑이 플랫폼에서 올라왔다. 아이보리색 캡 모자에, 붉은색 체크 난방을 입은 채 폴짝폴짝 뛰어오는 모습이 집 앞 마실 나온 고등학생 같았다.


 “나 위가 아파. 근데 배고파. 그리고 나 내일 생일이야!”


 쫑은 가끔 이렇게 한 번에 하나만 말하기 룰을 어겼다. 그렇지만 이번엔 마지막 말이 제일 중요하게 들렸다. 그녀의 말대로 내일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쫑은 최근 기분이 다운되는 일이 잦았던 탓에 사람도 잘 만나지 않았다. 아마도 생일마저 칙칙한 방구석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생일선물로 바다를 선택한 셈이다. 들뜬 쫑과 함께 나는 바다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 선물을 마음껏 만끽했다. 방방 뛰는 발끝이며, 바다를 담은 멍한 눈동자며, 나풀거리는 뒷모습에서 사푼한 행복함이 묻어 나왔다.


어쩌다보니 쓸쓸하게 찍혔지만 쫑은 매우 신난 상태였다.


  바다 구경도 잠시, 끼니를 놓친 우리는 점심메뉴부터 정해야 했다. 속이 좋지 않은 쫑을 위해 우리는 초당순두부집을 찾아갔다. 유명한 집들은 주차할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유명 맛집 타운의 특징은 사실은 맛이 거기서 거기라는 점이다. 다만 어떤 집이 TV나 SNS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 왠지 그 집에 특별한 비법이 있어 보이고 꼭 한 번은 먹어보고 싶어 지도록 호기심을 자극한다. 줄 서는 집을 피해 쫑과 나는 비교적 한산해 보이는 해물순두부집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국물에 담긴 부드러운 순두부가 술술 잘 넘어갔다. 속이 안 좋다던 쫑도 곧 잘 먹었다.


 “난 네가 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엄청 헷갈렸어” 쫑은 순두부를 먹다 말고 나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나는 흔쾌히 동행을 제안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리곤 혼자 하는 여행의 적막이 오늘 아침에야 깨졌다고 고백했다. 또한 오고 싶어 하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 너 말고도 연락 왔던 사람은 더러 있었어. 쏨도 오고 싶다고 했었는데…. ”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 불러봐 불러봐.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쫑은 이번엔 한 번에 하나만 말하기 룰은 지켜졌지만, 신호등 켜고 말하기 룰을 어겼다. 그래도 쏨 이야기가 나오자 오래간만에 아이처럼 신난 쫑의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쏨 역시 나의 입사동기다. 성격이 털털하고, 애교와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쏨에게 톡을 보냈다. 쏨이 최근에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것 같은 사진을 SNS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하게 불러도 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저녁 먹다 강남에서 친구 부르는 것도 아니고, 번개처럼 부른다고 정말 올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근데, 쏨의 반응은 의외였다.


‘나 지금 여행 갔다 와서… 다시 나간다면 엄마한테 맞을 텐데…? 근데, 지금 가면… 픽업 와? 진짜 간다? 지금 열차 결제한다? 바로 간다? ’


 비록 의문형을 띄었지만, 그녀의 톡에는 왠지 모를 반가움이 느껴졌다.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든 모양이다. 쫑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기어코 그녀의 물음에 확신을 불어넣으라고 독촉했다. 내가 쫑도 내일까지 있을 거라도 말하자, 쏨은 바로 열차표를 예매했다. 짐을 든 채로 300km/h의 속도로 우리에게 달려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쫑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나는 부랴부랴 에어비엔비 사장님께 두 명의 손님이 더 있다고 알리고 추가 요금을 지불했다. 저녁엔 바닷바람 부는 곳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을 요량이던 나의 일정이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뜻밖의 동행들 덕이었다. 바닷바람과 좋은 친구들이 있는 저녁. 그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 소리가 노랫말처럼 들리는 상상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와 쫑은 쏨을 기다리기 위해 강문해변 근처 카페에서 잠시 각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글을 쓰고 쫑은 그림을 그렸다. 열차 시간이 가까워올 즈음 쏨을 데리러 강릉역에 갔다. 쫑과 쏨은 강릉역이 떠나갈 듯 소리치며 격한 환영인사를 나눴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엔 영락없이 MT 온 대학생들 같았다.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강릉 시내를 뒤로 한 채 안목해변으로 달렸다. 어제 혼자 올 때만 해도 고요하던 차 안은 이제 두 친구의 수다로 가득했다. 오늘 아침 카페에서 느꼈던 사람이 주는 평화로움이 나의 차 안으로 옮아왔다. 나의 손도 리듬을 타며, 두 사람의 주는 활기참에 여행의 묘미에 들떠있었다.


바다에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한 두 사람.


 해변에 도착해서 우리는 곧장 쏨이 준비해온 리스트에 있던 유명한 조개구이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테라스에 자리 잡았다. 해가 지기 직전의 시간. 동해하면 일출이라지만 핑크빛으로 물드는 하늘은 그 어떤 서해의 일몰보다 아름다웠다. 갓 끓여온 해물라면이 부글부글 끓었다. 괴팍한 소리를 내며 입을 쩍 벌리는 조개들이 우리 앞에서 익어갔다. 바람은 살살 불어 우리들 이마의 땀을 식힌다. 도란도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들의 입모양에서 익숙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등 뒤에는 이름 모를 낯선 얼굴들이 배경이 되어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사진으로는 한 번에 담지 못할 풍광이었다.


“얘들아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뭔가 다 씻은 듯이 낫는 거 같아!” 쫑이 말했다.

“너 웃는 거 보니까. 좋다. 내일 생일파티도 해줄게” 나는 가리비를 뒤집으며 말했다.

“우리 근데 여행 언제 마지막으로 갔지?” 쏨이 석양을 보며 말했다

“다시 연수 때로 가고 싶다! 제주도로!” 쫑이 젓가락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시간이 진짜 빠르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지?” 나는 그런 쫑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사 가기 싫어…흐잉…” 쏨이 응석 어린 말투로 말했다.

“됐어. 또 회사 얘기. 이제 금지야. 자, 조개나 더 먹어” 내가 말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했던 얘기를 또 한다. 넣어두었던 추억을 다시 소환하는 것도, 늘 하던 회사 욕을 재활용하는 것도, 지나간 연애 얘기를 다시 하는 것도, 별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 깔깔 웃는 것도, 늘 우리에겐 재밌고 새로운 일이었다.


누군가 하늘에 핑크뮬리를 심어놓았다. 카메라로 다 담지 못할 풍경이었다.


  우리는 조개를 실컷 먹고도,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과 주전부리 한 다발을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강릉 시내를 지나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했다. 비상용으로 쓰일 법한 오래된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 2층 독채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건축가가 사는 집이라 그런지 따뜻한 조명과 감각적인 타일들, 책과 커피로 장식된 소품, 통기타가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우린 정말 MT라도 온 대학생들처럼 들떴다. 씻고 나오자마자 쫑은 자기 전에 꼭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며 우리에게 필라테스를 알려줬다. 내 허리는 단단히 굳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맥주를 마시던 쫑은 기타를 들고 춤을 추다가도 블루투스 소리에 맞춰 희한한 춤을 추기도 했다. 쏨은 쫑의 모든 쇼의 관객이 된 것처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우린 편의점 털이해 온 것들을 하나 둘 먹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아는 지인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슨 10대 사춘기 학생들이라도 된 마냥 시끄러워지곤 했다. 강릉에서의 이튿날은 그렇게 나의 인연들과의 사부작 거리는 이야기들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아침을 맞이한 숙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제법 내렸고,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안 그래도 태풍이 올라온 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우리는 서둘러서 나갈 준비를 했다. 아침으로는 장칼국수를 먹었다. 이 역시 쏨의 리스트에 있던 맛집이었다. 적당히 우중충한 날씨를 달래줄 완벽한 한 끼였다. 배를 채운 우리는 쫑의 생일파티를 해주려고 강문해변을 찾았다.


“이거… 비가 점점 폭우가 되어가는데?” 뒷좌석에서 노래를 듣던 쏨이 말했다.


 해안을 달리는 와중에도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원래는 쫑에게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에서 촛불 끄는 의식을 해주려고 했는데 비가 너무 와서 쉽지 않아 보였다. 아쉬운 대로 생일 축하노래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불러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가시지 않았다. 강문해변까지 왔는데, 도깨비 촬영지를 이대로 지나칠 순 없었다. 우리는 쫑이 무엇이라도 손에 들고 '후-' 부는 장면을 건질 심산으로 우산을 쓰고 기어이 밖으로 나갔다. 촬영지인 부둣가에 쫑을 세워두고는 후다닥 카메라 셔터를 눌러재꼈다. 찍고 바로 돌아서려는데 한 커플의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 그것까지 찍어주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바람도 불고, 옷은 이미 다 젖었는데, 우리 얼굴에는 개구진 미소가 가득했다.   


간절히 도깨비를 기다리는 쫑의 모습이다.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에 비는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다만 태풍이 동해안에 상륙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서울로 향하면서, 명절 귀성길을 방불케 할 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쫑과 쏨은 운전하느라 내가 고생한다며, 분위기가 처질 때면 신나는 노래를 틀었다. 혼자 돌아왔다면 지루하고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본디 아무리 좋은 여행의 끝이라도 돌아올 때는 헛헛함이 가득하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이 친구들과 함께여서 이번 여행은 심심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나를 위해 300km/h의 속도로 달려와준 이들이 아니던가. 비록,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30km/h도 안 되는 구간들을 반복한다 해도, 나와 친구들 과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소중한 시간들이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는 속도가 느려질수록, 우리의 추억은 점점 더 짙어질 테니까.



장법준이 부릅니다. '당신과는 천천히'




P.S

건축가의 집 사진은 덤이다.


건축가의 집은 자연스러운 감성이 살아있다.
<좌> 거실의 전경. <우> 흡사 리틀포레스트 같이 나온 설거지 하는 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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