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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의 세상 Oct 19. 2020

백상에게 상을 주고 싶던 날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세상에 낭만적인 밥벌이는 많지 않다'  - 주변 꼰대 누군가


  에이, 그래도 광고회사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나의 밥벌이 무대는 여느 누구와도 비슷하게도 회사라는 공간이었다. 낭만의 신이 나를 외면하는 순간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합격과 월급의 달콤함을 안겨주는 곳임과 동시에, 무엇보다 ‘인생은 실전이야 XX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입시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익숙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 꾸역꾸역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지하철에 무거운 몸을 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해둘걸. 그 시절 출근은 완료하고 나면 나에게 유난히 모질게 굴던 미운 상사를 향해 부모님에게도 잘 비추지 않는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쁜 업무에 치이다 퇴근하면 새벽이 되길 여러 번, 내가 이러려고 입사를 했나 자괴감이 밀려오곤 했다. 나의 27살 광고회사 신입시절은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아, 낭만의 신이시여.


 

날씨 좋은 날이면 회사가 감옥처럼 느껴진다.


  처음엔, 나만 이런 걸까, 나만 바보인 건가 싶어 화가 났다. 입사할 때 자소서에 썼던 입사포부와 꿈만 보면 위인전 저리 가라 였던 나였다. 현실은 위인전은커녕 입사 후 나의 현실은 인간극장의 연속이었다. 일단 일찍 일어나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학교 다닐 땐 기어이 1교시를 피해서 수강 신청하면 된다지만, 회사 시간표는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겨울이면 이불 밖은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신입시절 나에게 꿈이라는 단어는 꿈나라에서나 마주하는 것이었다. 장래희망에 당당히 광고기획자를 적던 꼬맹이의 야망은 온데간데없고, 꿈꾸던 미래는 현실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었다. 그 시절 동기 A는 내게 말했다. ‘지금 가장 간절한 꿈은 퇴사다’라고. 그 친구는 벌써 몇 해전에 퇴사했다. 용감한 녀석.



 

 아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난 그런대로 꿈나무였다. 회의에서 더 멋진 아이디어를 내는 신입이 되고 싶다든가, 남들보다 앞서가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든가, 나에겐 나름의 목표가 있었다. 물만 잘 주면, 얼마든지 잘 자라날 의지가 있는 나무였다. 그러나 회사는 생각보다 칭찬에 박한 곳이었다. 신입시절엔 내가 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자주 했었다. 잦은 실수로 사수에게 꾸중을 듣기를 여러 번,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적응을 못한 탓인지 꿈꾸던 직장생활과 나의 현실은 안드로메다만큼 멀어져 있었다. 물론, 지금 와서 돌아보면 모든 사회초년생들이 겪는 흔한 성장통이었을 테지만.

 

 그렇게 한참 풀이 죽어지내던 어느 날. 평소 같았으면 친구들이라도 만나 맥주 한 잔 했을 평일 저녁. 웬일인지 그날은 TV를 켜고 소파에 푹 꺼져 있고 싶었다. 본척만척 틀어놓은 TV엔 백상예술대상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처음에는 연말도 아닌데, 무슨 시상인가 했다. 심드렁하게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리던 찰나, '예술대상' 이란 말이  단어가 나를 붙들었다. 대학생 시절 나는 광고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 그렇게 나를 표현하는 예술. 이름 모를 광고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광고는 자본주의가 허락한 유일한 예술'이라고. 하지만 정작 광고회사에 다니는 나는 그 예술을 하고 있는가. 그 많던 열정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루하루 혼이 날지 안 날지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과연 내 처지를 예술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어딘가 언짢아진 마음에 채널을 돌리려는데, 마침 축하공연 차례가 되었다. 예술대상의 축하무대엔 누가 올랐을까? 국내 탑 아이돌? 아니면 김나박이 중 한 사람? 나는 텁텁한 마음에 의심의 눈초리로 TV를 응시했다. 그러나, 백상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축하공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33인의 단역배우’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드라마 김과장의 삽입곡인 ‘꿈을 꾼다’.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이야기 위에 내일의 꿈을 위해 담담히 노력하는 단역배우들의 목소리가 입혀지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각자 단역으로 출연했던 영화의 한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배우 한 명에 한 소절씩, 진심을 담아 노래했다. 때론 떨리는 목소리로, 때론 소담스러운 진심으로, 때론 당찬 눈빛으로, 그들은 여느 스타들 못지않게 무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관객석에 앉아 듣고 있던 유명 배우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의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방구석 1열에 앉아 있던 나 역시 가사 내용과 그들의 목소리에 두 눈망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때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괜히 웃음이 나와


정신없는 하루 끝에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지나간 추억을 뒤돌아보면

입가엔 미소만 흘러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나는 꿈을 꾼다


<꿈을 꾼다>, 서영은, 드라마 김과장 ost


 이름도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단역 배우들, 그들이 부르는 이 노래. 대배우들이 눈물짓고 객석에선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꿈꾸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거기 있었다. 노래 중간에 그들의 인터뷰가 스크린을 담담히 메울 때, 나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배우라는 이름의 진심을 꿈꾸는 사람들. 출처: 백상예술대상 유튜브



저에게 배우란

‘기적’

‘인생을 표현하는 예술가’

‘행복’

‘가슴 뛰는 일’

‘나의 또 다른 이름’

‘가족’

‘초심’

‘꿈입니다’



  꿈이라는 단어, 무기력함에 빠져있던 그때의 내가 잊고 있던 말이었다. 직장은 현실이라지만, 지금의 현실이 나에게도 한 때는 꿈이다. 멋진 광고인이 되어 사람들 앞에 내가 만든 광고를 내어놓는 일, 회의실에서 멋지게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나의 모습, 상상만 해도 설레던 꿈이었다. 매일 늦은 시간 독서실에 나오고 친구들과 밤새 공모전 준비를 하고,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던 길 버스 안에서 광고판들을 올려다보던 시절. 그땐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런 경험은 꼭 광고인을 꿈꾸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직장인들,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를 마시며,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당당히 퇴근하는 모습, 오늘도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모두가 동경의 대상이자 꿈에 그린 모습일 테니까. 우리는 노력해서 입사한 회사건만 힘든 현실에 치여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살고 있진 않은가


33명의 진심이 백상 위에 당당히 서있다. 출처: 백상예술대상 유튜브


 

 나는 축하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TV 앞에 앉아 있었다. 잠시 눈물을 훔치며 내 마음을 돌아보았다. 나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오늘의 현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꿈이었는지 돌아보았다. 잠시 나는 나를 다독여보기로 했다. 회사를 다니는 지금의 나의 모습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고 있는 과정이라고, 조금은 용기를 가지고 그 꿈을 완성시켜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 날 저녁, 나는 일기에 나의 작은 목표를 옮겨 적었다.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그 가사가 나의 마음에 콕 박히였다. 누워서 그 말을 되새기면서 참참 생각하다 보니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백상예술대상에 어떤 상이라도 주고 싶었다. 정확히는 그 축가무대를 기획한 사람들과 단역배우들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꿈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꿈꾸던 만큼 화려하지 않아도,  꿋꿋이 하루를 견디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우리 모두 충분히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출처: 백상예술대상 유튜브

p.s.


제53회 백상예술대상의 축하공연에는 모두 33인의 단역배우들이 소리 높여 꿈을 노래했다.

우리 모두에게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용기를 준 배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금광산 김단비 김득겸 김민지 김비비 김영희 김유정 김정연 김주영 김태우

김현정 박병철 박신혜 박종범 배영해 백인권 송하율 이윤희 이재은 이주원 이진권

임수연 전영 조미녀 차수미 최나무 하민 한성수 한창현 핲기 홍대영 홍성호 황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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