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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편선 Feb 02. 2020

2019년에 알게 된 것들

- 어제는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일찍부터 늦게까지 놀았다. 카레와 라씨를 먹고선, 카페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다 해산물에 술을 마셨다. 자정 무렵이 되니 적당히 취기가 돌았다. 한 친구가 "나는 요새 앨범을 잘 못 듣겠어. 새로운 음악도 많이 듣질 않아. 그게 싫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요새는 나 역시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적이 많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부러 한 앨범을 듣는 경우를 제외하곤, 마치 랜덤으로 재생하듯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듣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론 앨범 단위의 서사를 구축해내고자 하는 음반들도 전보단 줄어든 듯 싶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앨범 단위의 서사'란 아마도,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미적 산물일 것이다.


- 인턴십을 하는 학생들이 회사에 들어왔다. 오리엔테이션은 나의 몫이다. 본의 아니게 투 머치 토커가 되어야만 하는 시간, 어떤 맥락에선 했던 이야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현대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였을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만들어진지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요. 스마트폰이나 SNS, 그리고 지금의 여러 이슈들, 생각해보세요." 그런 요지의 이야기였다.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두렵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 서른 다섯이 되었다. 한국에서, 남성으로, 8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사회에서 규정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0년대도 이제는 아득하다. 그 아득히 멀리 떨어진 것만 같은 시기에,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즉,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옛날 사람이란 뜻이다. (발가락부터 명치 정도까지 옛날 사람, 명치부터 정수리까지는 요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습속이란 무섭다.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알게 된 것 중 많은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선 유효하지 않거나, 별 필요 없는 것들이다. 무슨 대단히 트렌디한 사람인 적도 없는 주제에, 옛날 사람이 된 것을 걱정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스무살 남짓할 무렵 했던 것처럼 편견없고 자연스레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지는 걱정된다. 앨범 단위의 서사 운운하며 자칫 다른 이에게 내 세대의 기준을 강요하고자 하는 이가 될 지 걱정된다.


(그러나 앨범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기타팝이나 주성치 혹은 온갖 종류의 유치하고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취향들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편으론 앨범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를 전력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믿는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할 권리는 누구나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 아침에는 간만에 어떤날의 첫 앨범을 들었다. 여전히 완벽하게 아름다운 앨범이다. 다만 앞서의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워진 상태라서, 이 앨범을 '완벽하게 아름답다'고 간증하는 나의 믿음이 조금은 슬프고 누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서른 다섯이 되었다. 서른 넷에서 다섯으로 넘어가던 계절인 겨울에, 나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나도 이제는 조금 늙었구나'란 생각을 했다.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그 시기의 내가 무척이나 바빴던 탓에 돈과 시간의 부족함도 크게 다가왔다. 모든 자원이 바닥을 드러낸 꼴을 보고선 '자원의 한계'라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돈과 시간은 측정가능한 자원이지만 몸과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나는 본의 아니게 자기착취를 일삼았다. 회사 만이 아닌, 회사와 개인의 삶, 작업,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모두 일정 수준 이상까지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번아웃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 번아웃 비슷한 증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도, 그 기간이 지나치게 길지도 않았다 ― 다만 차분함이 결핍된 일상을 살게 되었다고 할까.


(차분함에 대한 갈구는 이전의 삶에선 별로 없던 일이었다. 이 역시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으로부터 기인할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지금의 나에겐 차분함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느낀다. 피곤에 쪄들어 그저 뻗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이를테면 지금 이렇게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 같은.)


- 지난 2019년에는 개인으로서, 또는 회사의 한 구성원으로서, 또는 여러 조직의 멤버쉽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갯수로만 따지면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종류의 프로젝트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해온 해일 것이다. 그 중에서는 잘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런 데다 쓰는 건 좀 웃기지만, 내가 정말 집중해서 열심히 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 열심히 한 일들은 대개 잘된 편이었고 그렇지 못한 일들은 대개 안 된 편이었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탓에, 그 모두가 나의 탓은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부채는 지울 수 없다. 어릴 적에는 막연히 후회 없는 삶을 바랐다. 지금은 더 이상 부채를 늘리지 않는 삶을 바란다. 늘리지 않거나 본의 아니게 늘리더라도 부채보다 더 많은 것을 갚을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한다. 차년도의 경제성장 전망을 현실적으로 조정했다.


- 그러고보니 2019년에는 몇 번의 강의도 진행했다. 주로 음악을 만드는 일에 대한 강의였고, 작곡과 작사보다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프로세스로 일해야 효율적인가?'에 대해 주로 말했다. 그러나 막상 강의하는 나 자신은 언제나 일관성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늘 효율적으로 일해오지도 않았다. 비웃음을 살 일이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변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 일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누구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 잘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기도 하고, 나라는 한 개인이 일을 잘 하도록 도와줄 특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일을 잘 하게 된 걸까. 모르겠다. 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하고 잘 배분하는 사람이 된 것은 맞다. 잘 쳐낸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전히 잘 까먹는다. 이건 서른 다섯 평생 잘 까먹는 사람이었던 탓에 이 생에는 못 고칠 확률이 크다. 여하간 빨라졌다. 빨라졌지만 아쉬운 것은 일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진 못하는 점이다. 마음 씀씀이가 두서 없다. 좋은 회사원은 하나하나에 마음을 덜 쓰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은 못 될 것 같다. 평생 못 될 것 같다.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일 잘 하는 사람과 좋은 회사원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냥 비약해 보았다.)


- 그래서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하고 내게 물어보면 나는 ‘일단 한국말을 잘 합시다. 물론 저도 잘 못 합니다.’라고 한다.


- 새해에는 많은 역할이 주어졌다. 남들 보기에 가장 커보일 변화는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이 된 것일 테다. 정작 나로서는, 휘두르고 싶어도 휘두를 권력과 휘둘릴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 해 그냥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살아갈 계획이다. 대표는 중요한 자리지만 협동조합과 사기업의 대표는 다르다. 사기업의 대표가 조직을 리딩해나가는 롤에 가깝다면 협동조합의 대표는 조직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을 진작시키는 롤에 가까울 것이다. 온전한 자의로 맡게 된 직책은 아니지만 ― 세상 천지에 '온전한 자의'란 얼마나 될까 ― 자리를 차지하게 된 바, 위세 떨지 않고서도 조직에 건강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다시 이름 없는 기여자로 돌아가고 싶다.


- 음악을 만들지 않는 것은 음악을 통해 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로서 다른 이의 작업을 돕는 것도 음악을 하는 것이고 오랜 친구들과 밴드를 하는 것도 음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에고를 강하게 투영한 작업을 하는 것과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 아무래도 종류가 다른 일들이다. 처음 만들기를 그만 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어져서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믿진 않지만 최소한 이전보다 나 자신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말할 순 있다. 요새는 희끄무레한 망상들에 종종 사로잡힌다. 나는 망상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지금을 조금은 더 즐기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 쓰고 나니 네거티브한 에너지로 가득 찬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건 좋은 건 나 혼자만 알고 지나가려는 이기적인 인간인 탓일 테다. 2019년의 내게는 좋은 순간이 많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 자원의 한계로 더 많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건 조금 아쉽긴 하다만. 조금 더 쓸 것이 있긴 하지만 카페의 영업종료 시간이 3분 남은 관계로, 따지고 보면 이 정도로 마무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꼭 쓰고 싶었던 것만 하나 쓰자면, 2019년 최고의 라이브는 세종문화회관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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