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무엇을 했나.
올해처럼 공연을 많이 한 해는 없었다. 공연을 59번 했다. 풀밴드로 36번, 솔로로 8번, 듀오로 11번, 트리오로 1번, 쿼텟으로 3번 했다. 많을 때는 한 달에 8번을 하기도 했다.
내년 2월이면 만 40세가 된다. 윤이 대통령이 되기 전 기준으로는 이미 마흔을 넘었다.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청년이라 부르긴 어려운 나이일 것이다. 나는 내가 마흔 무렵쯤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몇 번, 아득함을 경험한 순간이 있었다. 한 번은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 부문을 수상했을 때다. 우리 밴드의 이름이 수상자로 호명되었을 때, 잠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른 한 번은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을 때다. 수많은 관객들과 함께 펄럭이는 깃발들을 보며,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그것, 그 장면이 나의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고 싫음, 기쁨이나 우울함을 떠나, 그 사건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은 지금도 종종 이물감을 느낀다.
나는 도파민이 넘치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반대편에 있는 허무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건의 규모를 가볍게 넘어서는 어떤 커다란 경험 앞에서, 자연스럽게 폭발하듯 분출하는 쾌감을 통제하기란 범인으로서 쉽지 않다. 나와 동료들은 이 통제하기 어려운 마음을, 다만 매일의 성실함으로 치환하기 위해 애썼다. 무대에서는 좋은 쇼를 선보이고, 무대 아래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좋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애썼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주어진 삶, 기왕이면 성심성의껏 살아보고 싶었다. 한 번 사는 삶이니까, 애쓰더라도 해보고 싶었다.
언제까지 음악가로 살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적정 나이를 훨씬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들 역시 대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에 어떤 ‘결정’을 내렸다. 나 또한 30대 초반, 이전 밴드가 해산한 뒤 적잖은 기간 동안 회사원으로 생활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활동도 음악가로서는 이미 after life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나는 이미 ‘밴드’만으로는 한 인간으로서의 생계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연히 투잡이나 쓰리잡, 혹은 아르바이트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우리보다 더 큰 인디 신을 가진 곳들도 사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다. 다양한 일을 병행해야 음악을 해나갈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지나치게 운이 좋았고, 2025년 역시 그런 해였다. 아르바이트나 취업 대신 작곡가로 일할 수 있었다.
영화 〈트루먼의 사랑〉, 어린이·청소년 무용 〈색색깔깔 내가 꿈꾸는 세상〉, 전시 〈신민준 : 살아가기 연습〉, 연극 〈히스테리 앵자이어티〉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이 중 〈트루먼의 사랑〉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고, 올해도 여러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다른 작업들은 공연이나 전시 기간이 끝났지만, 웹 상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트루먼의 사랑〉과 〈히스테리 앵자이어티〉에는 큰 힘을 쏟았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는 뜻이다. 〈트루먼의 사랑〉은 후반 작업 과정에서 여러 차례 콘셉트를 뒤엎은 끝에, 겹겹이 쌓은 비올라로 이루어진 현악 스코어로 거의 모든 트랙을 작업했다. 하지만 나는 클래식을 전공하지 않았고, 현악에 대한 이해도도 높지 않아 레코딩과 믹싱까지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이오진 연출과의 세 번째 작업이었는데, 기존에는 극본이 완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반면 이번에는 배우들과 연출이 공동으로 극본을 써나가는 방식이었기에 상당히 늦은 시점에서야 극본이 완성되었다. 거의 드라마 쪽대본을 쓰듯 마지막 순간까지 작업을 거듭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두 작업 모두 양질의 스코어로 완성되었고, 개인적으로는 큰 애착이 남은 작업이 되었다.
프로듀싱도 했다.
특이하게도 올해 작업들은 모두 협업 형태였다. 이전까지는 대개 운영 중인 독립음악 프로덕션 오소리웍스를 통한 단독 작업이 많았는데, 컴필레이션 [새노래]는 민주노총·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과 함께했고, 안지원의 [아마추어의 집]은 아템포랩과 함께했다.
프로듀싱은 늘 쉽지 않다. 결국 상호 신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양적·질적 확장이 필요하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몹시 지난한 작업이다. 어쩌면 내 개인적인 성향이 나를 더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도 쉽게 믿지 못하는데, 남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9년부터 2025년까지 발표한 타이틀이 50개를 넘는다. 그 모든 작업이 투잡이나 쓰리잡을 병행하며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과정에서 고갈되거나 지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만난 안지원의 [아마추어의 집]은 다시 힘을 내볼 수 있게 해준 반가운 작업이었다. 남해에 사는 안지원이 며칠간 우리 집에 머물며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고, 이런저런 악기를 함께 두드리며 방향을 정했다. 연주의 많은 부분을 안지원과 친밀함을 나누고 있는 친구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주면서, 여러모로 평화롭게 흘러간 작업이었다.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 나 또한 무언가를 칼같이 세공하려 들지 않았다. 완성된 음반은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작업들처럼 대단한 반향을 얻지는 못했지만, 아주 느리게 반응을 얻고 있다. 생각해보면 ‘억 단위’의 무언가를 투여하는 작업도 아닌데 단번에 큰 반향을 기대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작지만 꾸준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글도 썼다.
고정 지면을 갖게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음반 리뷰어로서 음악에 관한 글을 자주 썼지만, 이후로는 ‘일’로서의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같은 필드에서 음반을 만들고 공연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이의 작업을 평가하는 일이 점점 마음 편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활인으로서 삶을 꾸려가며 지적 허영심이 자연스럽게 줄어든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러던 중 연초에 <시사IN>에서 연재 제의가 들어왔고,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음악잡지나 문화예술 전문지가 아닌 시사 잡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에 평균 한 편꼴로 열두 편을 쓰는 동안,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신보나 신인 위주로 소개할 것, 또 하나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쓸 것. 대단한 식견도, 깊고 넓은 취향과 안목도 없는 상태에서 어쨌든 ‘완성된’ 원고를 써내야 한다는 것은 종종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논리적으로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당연히 개편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또 한 번 운 좋게도 살아남아 2026년에도 글을 쓴다.
그 밖에도 많은 일을 했다. 강의도 했고, 이런저런 콘텐츠를 찍었고, 비디오 편집도 많이 했고, 토론회에 나가고 심사와 인터뷰도 했다.
물리적으로 정말 바빴고, 정말 힘들었다. 올해처럼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지 못한 적도 없었다. 여러 번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만큼 어쩔 수 없었지만, 결국 일을 선택하고 만든 건 나 자신이니 책임질 일이다.
자연히 좋아하는 것, 해보고 싶은 것들 중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나마 가을 무렵, 아마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작업이 한창일 때쯤 ‘이대로 가다가는 텅 비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닥치는 대로 책을 사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읽었다. 끝까지 완독하지 못한 책도 많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내가 너무 나 자신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는 언제나 견디기 어렵다.
2026년은 또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잘 모르겠다. 이 업의 특징 중 하나는 다음 해의 전망 따위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다만 한 가지는 정했다. 신작을 준비한다. 가능하다면 ‘발표’까지 하고 싶다. 원래는 조금 천천히 갈 생각이었지만, 이미 발표해야 할 곡들이 충분히 쌓여 있고, 더 이상 주저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도 모르겠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조금 더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어졌다. 못 하기 전에 해보고 싶어졌다.
2026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