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난 후
"요즘 그 영화 무조건 봐야 한다던데? 다들 너네 아빠 손 붙잡고 꼭 보라고 하더라"
인터넷에서 뜨거운 82년생 김지영 이야기가 엄마의 귀에도 들어갔을 줄이야. 엄마는 그 영화가 왜 그렇게 뜨거운지 모른 채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빠 대신 이모와 직장 동료분들의 손을 붙잡고 말이다.
"엄마 어땠어?"
라고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엄마의 눈은 시뻘겋게 퉁퉁 부어있었다. 뒤이어 나온 이모도, 엄마의 직장 동료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직장 동료분들은 연령대가 20대 초반부터 50대 후반까지 다양하다. 그들 모두 오열했음이 역력한 얼굴로 비척비척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고등학생 여자아이들 눈 마저 시뻘겠다. "엄마 어땠어?" 라고 물은 내 눈도 이미 퉁퉁 부어있었다.
영화를 함께 본 연인은 영화 시작 전에 휴지부터 건넸다. 너 많이 울 것 같아서. 역시 첫 장면부터 수도꼭지였다. 그 후로도, 그 후로도 쭉. 팝콘은 먹을 수 없었고 목이 메어 억지로 음료만 마셨다. 다들 이렇게 우나 했더니 여자들은 다들 이렇게 운다고 했다. 82년생이 아님에도 모두가 82년생 김지영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비혼 선언을 한 나마저도 그녀에게 이입했다.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난 후 공감하지 못하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패배주의로 물든 영화라고 까지 비난한다. 난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여성이 많았으면, 이 영화가 현실감 없이 그저 패배주의로 물든 판타지 영화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내 흥행하지 못하고 사장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무척 슬프다.
내가 여성에게 갖는 다양한 감정 중 가장 큰 부분은 동정과 공감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세대를 뛰어넘는, 같은 성을 가졌다는 유대감이 있다. 그들이 행복했으면, 진심으로 잘됐으면 좋겠다. 결혼 제도를 비판하지만 그 제도를 선택한 여성은 축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들이 결혼을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때가 돼서' '직업이 없어서' '외로워서' '다들 해야 한다니까'가 아니길 바란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 없이는 안될 것 같아서, 그 사람을 위해 많은 책임을 져야 한대도 감당할 수 있어서 결혼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결혼 후의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선택했으면 좋겠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아무것도 몰라야 결혼할 수 있다고 한다. 눈이 멀고 정신이 나가야 할 수 있는 게 결혼이라고 했다. 아니. 다 알고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눈 크게 뜨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리고 결혼을 선택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 모두 82년생 김지영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나라의 인권 수준을 보려면 그 나라의 강아지와 고양이가 받는 대우를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대중의 공감을 받지 못하고 패배주의로 물든 영화가 되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살만한 나라가 된 것이라 믿는다. 난 정말 간절히 그걸 바라고 있다.
*스포 없이 작성하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영화가 상영관에서 내리면 더 자세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