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책임 사이에서

인용을 넘어 책임으로

by 유현수

세 달 전의 일이다. 지금 프로젝트에 입사 동기 애널리스트 A가 합류했을 때였다. 함께 일하던 컨설턴트 두 명이 갑작스럽게 이직하면서, A는 적응할 틈도 없이 두 개 팀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하필이면 그 팀들은 프로젝트 내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팀을 맡아본 경험도, 분야에 대한 이해도 충분하지 않았던 A는 이후 몇 달 동안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어느 날 회의 중, 프로젝트 매니저가 A에게 물었다.
“이 문제가 제기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A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러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그 순간 매니저가 말을 끊었다.
“A, 나는 네가 어디서 무엇을 들었는지 묻는 게 아니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네 구체적인 의견을 말해야지.”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직설적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 실제로 A에게는 꽤 날카로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꽤 괜찮은 피드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과했을지언정,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A는 거의 모든 문장을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가 느끼기에는’으로 시작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표현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말투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말의 시작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꾼다. 그 표현들은 미묘한 거리를 만든다.


말과 말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

생각과 책임 사이의 거리.


A가 말한 내용 자체는 충분히 타당했지만, 말의 시작 방식이 그 주장에 얇은 완충재를 덧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완충재는 안전해 보이지만, 동시에 단단함을 흐리게 만든다. 듣는 사람은 그 말이 어디까지 말하는 사람의 것인지 잠시 멈춰 생각하게 된다. 의견이라기보다 전달처럼, 주장이라기보다 소개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다. 나 역시 그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제가 들은 바로는…”
“제가 느끼기에는…”


그런데 시카고에서 가깝게 지내던 한 선배가 이 습관을 지적해 준 뒤로, 이 표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줄이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들어간 조미료가 음식의 본래 맛을 흐리듯, 그런 표현들이 말의 단단함을 조금씩 무디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문장의 내용보다 문장의 출처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은 정말 내 생각일까. 아니면 내가 동의한 누군가의 생각일까.


우리는 수많은 말과 생각을 접하며 살아간다. 읽고, 듣고, 배우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자신의 것이 되는 것 사이에는 작은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건너지 않은 채 꺼내는 말은, 어딘가에 여전히 기대어 있는 말이 된다.


물론 타인의 생각을 인용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때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정말로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조금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완충 표현을 덜어내면 문장은 단단해진다. 문장은 짧아지고, 의미는 또렷해진다. 그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온전히 자기 몫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질 것들이 늘어난다는 뜻이고, 동시에 우리를 바라보는 기대와 기준이 생긴다는 것. 책임의 크기는 상황마다 다르지만, 크기에 상관없이 그 무게 자체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


그래서 사회 초년생이든, 학생이든, 책임을 연습해 보면 좋겠다. 거대한 결정을 떠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부터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말해 준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린 문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을 꺼내고, 그 말이 가진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신뢰는 큰 성취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숙함도 나이나 직함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자신의 말 앞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태도, 그 말에 책임을 두는 태도, 그리고 그 책임을 피하지 않는 태도.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을 반복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것을 조금 더 담백하게 전달하는 일.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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