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언제나 경험 이후에 완성된다
최근 가까운 친구에게 와인을 하나 추천받아, 집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식재료 상점에 들렀다. 휴대폰에 저장해 둔 와인 사진을 들고, 이전까지는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았던 다양한 와인들의 진열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가 알고 있던 와인 품종이라야 카버네 소비뇽, 멀롯, 말벡, 피노 누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매대 앞에 서 보니, 이름조차 처음 듣는 품종과 지역이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찾던 와인은 이탈리아 투스카니 와인이었는데, 아쉽게도 이미 품절이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날은 대신 처음 보는 와인들 사이를 거닐며 ‘다음에는 이것을 마셔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던 하루였다. 익숙한 것을 찾으러 갔다가, 익숙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이미 아는 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종종 모르는 것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직접 보고, 경험하고, 만져본 것은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반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러워진다.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생긴다.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안다고 착각하곤 한다.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 검색해서 읽은 정보, 누군가의 평가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 버린다. 경험은 없지만 결론은 있는 상태. 생각보다 자주 반복되는 일이다.
대학 시절, 취업을 고민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기보다,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관심 있는 분야가 많았던 나는 여러 직무와 산업을 동시에 준비했다. 그만큼 선택을 미루는 시간이 길어졌고,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반대로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비교적 명확해 보였다. 특정 분야를 정해두고 그 방향으로 준비하거나, 선택지를 크게 넓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의 나는, 그런 확신이 오히려 부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또 다른 장면이 보였다. 막상 취업을 하고 나서야, 전혀 다른 분야에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며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 것이다.
대학 시절 우리는 최대한 정보를 모아 가늠할 뿐이다.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늠일 뿐이다. 잘 맞을지, 맞지 않을지에 대한 확신은 경험 이전에는 완성되지 않는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컨설팅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취업에 성공했을 때 정말 기뻤다. 하지만 부서 배치 결과를 확인한 순간, 예상하지 못한 실망이 밀려왔다. 컨설팅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HR, 전략, 재무, 기술 등. 나는 전략 컨설팅이나 재무 컨설팅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배정받은 곳은 기업의 재무·회계 조직과 시스템을 개선하는 기술 중심의 컨설팅 부서, 이른바 Finance Transformation 분야였다. 전공도, 인턴 경험도, 내가 준비해 온 방향도 이쪽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사 후 몇 달 동안은 부서 이동이나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나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일인데, 나는 지금도 그 부서에 있다.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하지 못했던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의 나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일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영역들.
그 안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점점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떠나고 싶다는 마음보다,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생각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이 일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도 달라진 것이었다.
우리는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계속해서 마주한다. 그토록 원했던 일이 막상 해보니 기대와 다를 수도 있고, 절대 맞지 않을 것 같던 일이 오히려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판단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경험 이전의 이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의미다.
지혜란 많은 것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데 있다고 했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판단을 보류할 수 있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지혜에 가까운 자세라고 생각한다. 이 태도는 커리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스스로를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판단을 미루는 순간 우리는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자신의 기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가끔 대학 후배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어떤 커리어를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이다. 좋은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직접 해 보라고.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면 시도해 보고, 맞지 않으면 그때 판단하라고.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확신부터 내려 버리지는 말라고. 우리가 내리는 많은 판단은 ‘가늠’ 일뿐인데, 우리는 그 가늠을 너무 쉽게 ‘확신’으로 바꿔 버린다.
그날 와인을 사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던 시간은 오히려 오래 남았다. 알고 있던 한 병의 와인을 찾으러 갔다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도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늘 익숙한 선택을 찾지만, 정작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은 대부분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확신보다 호기심을 먼저 두는 편이 좋다. 무엇이 나에게 맞는지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결국 직접 만나 보는 것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