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나를 채우는 문장, 그리고 독서
✣ 정수련의 단련일기
내가 쓴 책이 아니더라도 내가 보는 책이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뢰하는 사람이 책을 추천하면 그 책이 읽고 싶어지고, 그 책을 읽으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최근에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된 유퀴즈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공유 배우가 최근에 시 낭송 영상을 찍었다며 영상을 '공유'해주었다.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나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중략)
<아닌 것> 에린 핸슨
나를 설명하는 책, 내가 당당하게 이런 책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정세랑 작가의 책들이 떠올랐다. 한동안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한참을 읽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트위터와 각종 팟캐스트에서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란 소설이 계속 피드에 보였다. 작가 이름이 마음에 들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예쁜 이름을 좋아한다.) 소설도 그 동안은 잘 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이고, 나와는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좀 오래된 한국 소설은, 문장이 너무 딱딱하거나 어려웠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은 정세랑 작가의 소설에서 나는 바로 내 옆에서 있을 것만 같은 등장인물들을 발견했다. 내가 한 번은 마주쳤을 것만 같은 사람들 51명 각각의, 또는 연결된 짧은 이야기를 모아 아주 따스한 시선으로 써 내려 간 소설이었다. 그 이후 나는 '정세랑월드'에 입덕하여 그 동안 나왔던 정세랑 작가의 모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절판된 소설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 책들은 2019년도에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모두 나왔다.) 한 작가에게 꽂혀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이 망가뜨린 지구와 환경에 대해 걱정하고, 지금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산호의 죽음과 함께 인류도 멸망할 지 모른다는 말을 덤덤하게(내가 들었던 팟캐스트에서는 오히려 명랑한 목소리로 들렸다.) 전하는 작가가 너무 좋았다. 인간이 망가뜨린 지구를 거대 지렁이가 바꾸어가는 소설을 읽으며, 픽션이란 수단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강하게 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이후 난생 처음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20년 '새해 목표 그리기'를 하면서 ‘픽션 써보기’를 슬쩍 끼워 넣어 봤지만 작년에는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 언젠가 시도라도 해 보고 싶다.
# 책에 대한 단상
최근 “클럽하우스”라는 오디오 기반의 새로운 SNS가 연일 화제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서 만든 SNS인데, 초대장이 있어야 가입이 가능하고 소통은 사진이나 텍스트가 아닌 본인의 실제 목소리로만 가능하다. PC통신 초기에 다양한 주제의 방에 익명으로 참여해 대화를 나누는 것과 비슷하면서 다르게, 대부분의 사용자는 본인의 실제 사진과 목소리로 대화방에 참여해 이야기를 나눈다. 텍스트와 사진과 같은 데이터의 업로드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대화 콘텐츠는 흘러가기만 하고, 저장되거나 공유되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종이책을 읽는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매체가 다양해지고 다양한 정보가 그 매체를 통해 이미 발행되었어도, 최종 형태는 책으로 출판되는 경우가 많아보인다. 파워블로거가 책을 내고, 브런치 작가가 책을 내고, 유튜버가 책을 낸다. 클럽하우스를 보면서 저장되지 않고 스트리밍으로 흘러가는 서비스의 형태가 매우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치만 결국에는 이 서비스에서 새로운 셀럽이 된 사람은 또 그 내용을 가지고 책을 내거나, 이 서비스를 활용해서 마케팅이나 수익화에 성공한 케이스를 책으로 내지 않을런지, 새로 등장한 핫한 서비스의 앞으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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