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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련일기 Aug 15. 2021

의외로 할만한

#004 나를 비우는 시간 part2

✣ 황집중의 단련일기

달고 소중했던 한 잔의 효소 물



코로나로 일정과 상황에 적당한 차편을 제대로 찾지 못한 나는 이번 명절에도 서울에 그냥 있기로 했다. 엄마는 조금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아빠는 외지 사람인 내가 내려가는 걸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말이나 명절 같은 빨간 날이 크게 와닿지 않는 프리랜서라 엄마가 설에 혼자 심심해서 어쩌냐는 걱정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 괜찮아요. 친구들도 대부분 서울에 다 있고 가게도 다 열고 별로 다를 거 없어요.’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명절엔 공기가 달라서 솔직히 방에 혼자 있다 보면 그날만큼은 허전한 느낌이 들긴 한다.  


어차피 가족들과 못 만날 바엔 혼자 휴식이라도 제대로 챙겨 쉬자, 싶어서 영화를 잔뜩 보거나 사두고 못 읽은 책을 뒹굴뒹굴하며 읽고 싶었다. 산에도 오랜만에 가고 싶었고, 카페에서 낙서하며 멍때리거나, 어쨌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설 연휴 동안 무엇을 할까, 온전히 쉴 방법을 고민하다가 마음먹은 게 ‘단식'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의외의 결정이었다. 곡기를 며칠 끊다니. 그게 나에게 가능한 일인지, 시작하기 바로 직전까지 반신반의했다. 새해에 한 모임에서 단식했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의외로' 할만하다는 말과 좀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말갛게 바뀐 얼굴과 가뿐해진 인상을 보고 단식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긴 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무의식 속에 ‘단식을 하면 나의 찌든 몸과 정신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는 환상의 씨가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분이 새해에 흩뿌린 단식 경험담이 내 안에서 어느새 자라 설날에 피어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더불어 그분이 참여한 ‘전환마을 은평’에서 진행했던 단식모임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소비도 줄이고 탄소 배출도 줄이고 내 몸도 살리는, 내 몸을 비우고 몸 안의 감각이 살아나고 지구와의 연결됨을 느끼는 시간’. 매력적인 문구에 감탄하며 얼마 전에 맛이 궁금해서 사둔 효소도 마침 있어서 냅다 단식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처럼 오롯이 혼자 있는 연휴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나는 ‘효소 단식’을 했다. 서서히 식사를 줄이는 절식기를 거쳐 본격적인 단식 기간에는 식사 대신 효소를 탄 물을 마셨다. 이 효소가 단식 중엔 얼마나 감칠맛 나고 혀와 목구멍에 착착 감기던지. 큰 잔에 효소 물을 담고 천천히 조금씩 꼭꼭 씹어 마시는 시간이 무척 달고 소중했다. 식사 시간이 줄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시간도 없으니 하루가 정말 간편하고 길었다. 시간을 최대한 무용하게 보내자고 마음먹었기에 첫날엔 드라마 정주행을 하고, 둘째 날엔 동네 산책을 했고 카페에 가서 허브티를 마시며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냈다. 셋째 날이 되니 팽팽 남아도는 시간에 집안 정리도 하고 내친김에 이불 빨래까지 했다. 그야말로 연휴 동안 시간 FLEX를 제대로 한 기분이다. 



그렇게 3일의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갔고 하루 더 해도 되겠는데?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언덕길을 오르는 게 힘들어서 한 발 한 발 쉬어가며 걸어가야 한다는 것만 빼면  뭔가 몸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단기간에 몸에 대한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싶어 무척 신기하기도 했다. 그때 그분이 왜 의외로 할만하다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한 번도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커피가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다. 아침에 따뜻한 차를 대신 마시며 이걸로도 충분한데 왜 반드시 커피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커피 뿐만이 아니라 나의 습관과 그동안 음식에 의존했던 마음의 상태들을 다시 돌아봤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은 걸 경험하고 나니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많이 홀가분했다. 



천천히 식사를 늘리는, 단식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보식' 기간에 음식을 처음 마주한 아이처럼 모든 걸 새롭게 꼭꼭 씹어 먹었다. 미음에서 죽으로 가는 과정 동안 턱이 아플 정도로 씹어 먹고 적은 양으로도 충분히 배가 찼다. 배가 차기 전에 숟가락을 내려놓을 땐 스스로 기특하기도 했다. 물론 한 달 정도가 지난 지금 예전처럼 먹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습관적으로 간식을 우적우적 씹어먹기도 한다. 오래된 습관은 역시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단식의 경험이 몸의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 믿는다. 또 야금야금 몸에 독소들이 쌓이고 어딘가 이유 모르게 찌뿌드드해지겠지만, 새해가 오면 단식을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몸과 마음을 온전히 비우며 완벽한 휴식 시간을 가지는 것도 꽤 괜찮은 듯하다. 




+ 개인마다 몸의 편차가 있으니 단식을 시도하시는 분들은 경험이 많은 분의 조언을 구하거나 전문가와 상담을 받으신 후 진행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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