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련일기 Oct 10. 2021

휘청휘청

#013 새로고침이 필요한 순간이 있나요?

✣ 박연습의 단련일기


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하네요” 


답장이 왔다. 

“밥은 먹었어요?”


먹었다고 얼버무릴 때도 있지만 오늘은 사실대로 말했다.

"이런 날은 잘 못 먹어요."


A는 "에너지가 있어야 힘이 나는데~" 라고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나열했다. '케이크'라는 글자를 보고 냉동실에 있는 엑설런트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이런 날을 위해 사두었는데 막상 지친 날에는 나를 방치하기 때문에 잊고 있었다.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포장된 엑설런트 아이스크림. 파란색 엑설런트가 조금 더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난다. 파란색 엑설런트를 가져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텁텁한 입안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는 동안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A에게 이런 날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저는 걷기에 집착해서 무작정 걸어요.”

A가 많이 걸어서 발에 염증이 생긴 적이 있었던 게 생각났다. 


“오늘은 비디오도 안 봐지나요?”

A가 물었다. A는 내가 힘들 때 하염없이 영상을 본다는 걸 알고 있다. 


지난달 B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지난달부터 우울감이 찾아와서 B와도 비슷한 이야길 나눈 적이 있다. 서로의 자기파괴적인 습관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의 자기파괴적인 습관은 몸이 아플 때까지 영상을 계속해서 보는 거다.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생각을 영상으로 틀어막다 보면 아침이 되기도 한다. B는 먹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 화를 밖으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릇을 깬 적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는 그릇을, 마지막에는 아끼던 그릇을 깼다고 했다. 망설였지만 그래야 풀릴 것 같았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A는 걸으러 나가기 싫어질 땐 사진 앨범을 본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땐 타인의 콘텐츠를 보는 것보다 내가 쌓아둔 걸 보는 게 낫더라고, 좋았던 순간은 사진도 많으니까 사진 앨범을 보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모든 게 안 좋게만 느껴지던 날. 나는 침대 맡에 두고 한동안 즐겨 쓰던 감사일기를 다시 펼쳐본 적이 있다. 내가 쓴 감사의 목록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잊고 지냈던 그 날의 다정한 얼굴들이 떠올라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씩 둥글어졌다. 


좋은 게 무엇인지 알지만 좋은 걸 할 수 없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덜 나쁜 일이나, 다른 나쁜 일을 해보면 어떨까? 덜 나쁜 일의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나는 요즘 영상을 보는 것도 시큰둥해서 어제는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청하를 한 병 비우고 맥주 한 캔을 더 마시다가 곯아떨어졌는데 다음에는 종이라도 찢어야겠다. 혹시나 해서 보관하고 있는 서류뭉치도, 미련을 못 버리던 물건도 그런 날이라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즐거운 날에는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 


비틀거리는 일상이지만 요가는 계속하고 있다. 요가를 하면 먼저 발바닥을 지면에 단단히 붙이고 서는 것에서 시작해 다양한 자세로 몸을 비틀어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한다. 부들부들 떨면서 애쓰는 우리에게 원장님은 버티지 말고 움직이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무너진다고 움직이면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원래 중심은 휘청거리면서 잡는 거라고, 휘청거릴 때도 중심을 잡는 중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거다. 



> 뉴스레터 <단련일기> 구독하기 bit.ly/danryun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새로고침 버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