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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련일기 Oct 10. 2021

일상의 새로고침 버튼

#013 새로고침이 필요한 순간이 있나요?

✣ 정수련의 단련일기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나의 식물들. 자유로움이 좋다.

IT 회사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한 지 벌써 10년이 되어가고 있다 보니 ‘새로고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업무' 용어라는 생각이 든다. 로컬 정보를 다루는 서비스를 하고 있기에 새로고침 버튼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버튼이고, 개발 수정사항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캐시를 날리는 새로고침 행위는 중요하다. 사람들은 1초 사이에 정보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1초 사이에도 새로고침 버튼을 엄청나게 눌러댄다. 실시간 버스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자는 하루에 170만 번의 새로고침을 누르고, 한 달로 보면 무려 4800만 번이다. 새로고침을 한다고 해서 서비스 화면 전체가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화면 안 동일한 구조 속의 데이터만 새로운 데이터로 바뀐다. 그럼에도 새로고침 버튼을 끊임없이 눌러대는 이유는 순간의 데이터가 바뀔 거라는 기대를 해보고,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통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티켓팅을 할 때 미친 듯이 새로고침을 누르고 있는 사용자 입장에서의 나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 새로고침 버튼은 사실 ‘Refresh’라는 영어 명칭을 한글로 번역한 단어이다. 한글과는 살짝 다른 느낌이다. ‘새로고침’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운"이 좀 더 부각되어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만 같다. 그에 비해 ‘Refresh’는 잠시 쉬었다가 기분 전환한다는 느낌이 좀 더 든다.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리프레시 버튼을 누르고 싶은 순간이 종종 있다. 특히 오랜 기간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집이라는 공간에서 잠도 자고, 일어나자마자 저녁 6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다 보면 전환이 필요하다. 회사로 출퇴근하다 보면 출퇴근 길에 몸을 움직이고, 회사 안에서도 회의실을 찾아 다니며 위 아래 층으로 움직이곤 하는데, 집에서는 움직임이 절대적으로 적어지기 때문이다.


일하는 방에서 연달아 회의를 두세 번 하다 보면 공기와 에너지가 고여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창문을 열어도 무거운 공기가 환기가 안 될 때가 있다. 가끔 짜증나는 순간을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럴 때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현관 문을 열고 나가 식물을 본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를 보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남겨두었다가 회의가 끝나면 서서 설거지를 한다. 오래 앉아있어 굽어있던 몸을 펴는 것도 좋고, 쏴아아아 들리는 물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깨끗해진 그릇과 싱크대를 보면서 잠시나마 업무로 가득 찼던 머리를 비운다. 


식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엄청난 힐링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이번 여름에 깨달았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식물은 조금씩 천천히 자라고 있다. 고사리 같은 식물은 포자로 번식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흙을 뚫고 새 줄기가 돌돌 말려 올라오는데, 이 새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꽃이 있는 식물들을 많이 죽여서 한동안은 새로 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계속 녹색의 잎들만 보다 보니 강렬한 컬러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마침 작년에 키우던 무화과나무가 명을 달리하고 화분이 비어있어 꽃을 들이고 싶어졌다. 자주 지나는 골목의 꽃집을 오며 가며 어떤 친구가 좋을지 며칠 고민하다가, 11월까지 꽃을 계속 피운다는 ‘바늘꽃'을 데려왔다. 연분홍, 진분홍 꽃을 피웠다가 또 금방 졌다가, 다시 또 새 꽃을 피운다. 자고 일어나면 한 뼘 더 자라서 전깃줄을 한 바퀴 더 휘감아내는 덩굴식물 수세미를 보는 재미는 또 어떤가.


업무 중의 소소한 리프레시가 설거지와 식멍이라면, 똑같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타거나 영화관에 간다. 코로나로 영화관 방문이 꺼려져서 한참을 못 가다가, 몇 달 전부터 상암에 있는 시네마테크 KOFA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종종 보러 간다. 예전과는 달리 영화관에 사람이 많이 없고, 예약을 하는 것도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아서 (시네마테크는 영화 상영 이틀 전 홈페이지에서 예매를 하면 공짜로 볼 수 있다.) 쾌적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요즘 이국적인 풍광을 보고 싶어지면 자전거를 타고 영화관에 가서 화면으로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모습을 감상한다. 몇 주 전에는 ‘서핑 유럽'이라는 서핑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화면 한 가득 펼쳐지는 파도를 보고 있으니 내가 파도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파도가 높이 칠 때 동그랗게 말려서 그 안에 들어가서 서핑하는 것을 ‘배럴 서핑’이라고 한다는데, 배럴 서핑을 하고 있는 화면을 볼 땐 내가 그 파도 동굴 안에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30m나 되는 커다란 파도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을 볼 땐 아찔해져서 나도 모르게 ‘아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다지 덥지 않은 날씨였지만, 파란색을 실컷 보고 나니 시원함이 훨씬 더 느껴졌다.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큰 화면에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보고 돌아오면, 일상의 환기가 된다. 


코로나 때문에 내가 계획한 일상을 마음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려워졌다.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외출을 하지 못하고, 여행을 갈 수 없게 된 지 2년이 되어간다. 외부 탓만 하면서 그 자리에 고여있다 보면 금방 우울함이 몰려온다. 내가 찾은 일상의 "새로고침 = 리프레시" 버튼은 시선을 옮기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발걸음을 떼기 어려운 날도 많이 있지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하늘이라도 쳐다본다면, 조금 더 가능한 날엔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려 한강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고여있던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너무 소소한 방법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런 소소한 방법이라도 짜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코로나 현실을 조금이라도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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