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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련일기 Oct 10. 2021

우아한 내일

#013 새로고침이 필요한 순간이 있나요?

✣ 황집중의 단련일기

잘 도착한 와인 잔 두 개

9월이니 2학기 시작을 기념으로  ‘새로고침'을 주제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상반기의 일도 돌아보고 목표도 점검할 겸 말이다. 계획을 ‘새로 고쳐' 하반기를 잘 지내기 위한 바람도 있었다. 이참에 새해 목표를 다시 보니 세 가지 (1. 밤에 유튜브 대신 독서를 하고 2. 주말엔 반드시 쉬는 날을 갖고 3. 목요일 엑셀을 켜서 하기 싫은 정산 작업하기) 중 하나도 지키고 있지 않아서 머쓱해졌다. 밤에 책은 안 읽고 여전히 유튜브를 본다. 지난 주말엔 눈이 아픈 걸 참아가며 웹드라마를 정주행하기도 했다. 그래도 목표와 상관없이 상반기에 이런저런 모임을 하며 두꺼운 책도 몇 권 읽었으니 썩 나쁘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를 좀 쓸까 했다. 그런데 잘 써지지 않는다.


어느덧 [단련일기] 뉴스레터를 발행한 지 6개월이 넘었다.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 하나씩 글로 적어보는 시도를 했지만, 과연 나는 ‘단련'을 했는가에 대해 영 자신이 없다. 뉴스레터를 만들며 마흔을 위한 대비책을 스스로 찾고 싶었는데 여전히 나는 주어지는 일에 휩쓸려 한 치 앞만 보고 있다. 새해 결심도 사람들에게 알리면 지킬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하는 자기변명이 글마다 묻어있는 것 같다. 새 노트가 벌써 얼룩덜룩해진 기분. 그래도 박연습과 정수련의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서 즐겁게 뉴스레터를 만들고 있다. 취미를 공유하며 같이 어울려 노는 친구들이지만 글로 보는 친구들의 모습은 또 다르다. 마흔이 되면 우리는 각자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고등학생 때 서로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가늠해보던 때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놀랍다.


유난히 오후 일정이 많은 수요일엔 어중간한 저녁 시간에 일이 끝난다. 배도 고프고 진이 빠져 집에 오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몸엔 모래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기분. 왜 여전히 바쁜 걸까. 궁금해서 '나는 4시간만 일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책을 읽었다. 하루 4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4시간이라니. 나는 그동안 무얼 위해 살았나. 매일 밤에 한 시간 정도 그림일기를 그리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가 많다. 책에서 바쁘다며 탄식하는 사람들은 자진해서 바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을 보았다. 인생에서 바쁨이 피할 수 없거나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님에도 자신의 야망이나 불안 때문에, 혹은 존재의 확인이자 공허함을 가리는 역할로 바쁘게 사는 건 아닌지 콕 짚어서 묻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4시간만 일하는 그의 비법을 나에게 대입할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내가 벌인 일들의 대부분의 출발점은 걱정 때문이란 걸 확인할 순 있었다.


집에 가까워지면 가파른 언덕길이 나타난다. 일과를 마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듯. ‘후'하는 한숨과 함께 언덕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사 올 땐 매일 등산하듯 운동할 수 있다고 나름 좋아했던 언덕이었다. 백팩을 앞으로 돌려 멨다. 가방에 의지해 언덕을 오르며 나의 다음 집은 어디일까 궁금했다. 청년 주택 만료자들을 위한 중년 주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젠 이런 사회 보장 정책에 기대기보단 좀 더 자립해야 할 텐데. 주택 청약을 좀 공부해봐야겠다. 바쁜 게 좀 지나가면. 이렇게 미루면서 몇 년이 그냥 흘러가버린 걸 알고 있지만.


‘아, 좀 우아하게 살 수 없나.’ 묵직하게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우아하다’는 건 강약조절을 잘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양새일 거다. 힘을 주고 뺄 때를  잘 아는, 요동치는 환경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 아니면 적어도 겉으로 티가 내지 않거나. 가방을 열어 무게의 원인이었던 와인병을 꺼냈다. 적당히 세일하는 행사가 와인으로 오늘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병을 따 두고 얼른 샤워해야지. 바깥의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이제 좀 쉬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일은 프리랜서로 지내며 출퇴근의 경계를 만드는 나름의 요령이다. 인간적으로 저녁엔 좀 쉬어도 되지 않아?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로션을 찹찹 발라본다. 거울 속 내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수고했구나. 물잔에 와인을 꼴꼴꼴 따라 주전부리와 함께 먹는다. 


  

그리고 살짝 오른 취기에 물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와인잔 2개 세트를 하나 주문했다. 사실 쿠팡 와우 멤버십 해지 시기를 놓쳐 자동으로 결제된 멤버십 비에 대한 의미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흔의 언니는 제대로 된 와인잔을 갖추고 있을 거라 어떤 확신이 들었던 밤이었다. 나머지는 내일 와인잔이 도착하면 마셔야지. 


‘그래, 마흔이 되면 우아해지는 거야…’


얇은 잔에 입술을 대고 와인을 마시는 어떤 이와 마흔의 풍경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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