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인내하는 쾌락이 오래간다
이 뜬금없이 세속적이고 변태 같은 표현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마흔 중반을 넘어가는 지금 밥벌이 이외의 시간의 나를 표현하기에 충분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2가지 고통의 쾌락이 있는데 하나는 몸을 움직여야 하는 고통과 또 하나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 뒤에 오는 쾌락이다.
전자는 킥복싱과 등산, 러닝. 후자는 책 읽기이다. 이 두 가지의 고통은 매번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혹은 경험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매일매일 작고 새로운 쾌락의 세계로 인도한다. 쓰지 않았던 근육의 존재감과 점점 가벼워지는 호흡, 아무리 몸을 혹사시키고 괴롭혀도 다음날 느껴지는 몸의 가뿐함은 나를 더욱 반복적인 운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쾌락이고, 몇 시간 동안 침대에 배를 깔고 엎어져 꼼짝없이 텍스트에 묶여있는 책과의 시간은 습관처럼 빠져드는 스마트폰의 달콤함을 접하지 못하는 몸의 고통을 수반한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하루키의 심드렁함과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심리와 사회과학을 쉽게 설명해 주는 책들, 일상의 언어로 경험하지 못한 표현을 전달하는 신인작가의 텍스트들은 몸의 고통과 함께 다가오는 나의 두 번째 쾌락이 되었다.
쉽게 얻어지는 쾌락은 쉽게 휘발된다. 고통을 인내해야 얻어지는 쾌락은 오랫동안 나에게 습관과 흔적을 남긴다. 적어도 지금 나는 이렇게 나를 스스로 설득하고 있는 중이다.
단상의 기록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