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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크너 Nov 24. 2023

[홍대 북클럽 사람들] 01. 호르몬 탓인가

독서모임에 모여든 도시 직장인들의 날것 그대로 이야기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선 어른을 공경하며,

말을 삼가되 미덥게 하고,

널리 사람을 사랑하며,

어진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런 일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비로소 문헌을 배워야 한다."


_ 논어 학이 편 2장에서


다시 말해

“먼저 도리를 다하라. 그러고도 힘이 남거든 책을 읽어라.”



01. 호르몬 탓인가, 남들과 함께 읽고 싶어졌다.



민들레색 햇살이 곱게 드리운 한여름 오후였다. DMC역에 내려 화장실부터 찾아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쯤 하면 됐다’는 자신감을 갖고 8번 출구로 올라갔다. 오늘은 독서모임 첫 모임 날이다. 약속한 3시까지 15분 남았다. 묘한 긴장과 설렘을 안고 카페 문을 열었다. 저기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모임을 만든 리더이렷다.


“안녕하세요. 오늘 독서모임 참석하는 윤태설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백홍서입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30년 넘게 살았어도 낯선 사람과의 첫 대면은 늘 어색하다. 내 또래로 보이는 리더 백홍서는 중키에 마른 체형, 짧은 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깔끔한 스타일의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말수도 적고, 점잖아 보인다. 그도 나처럼 이 순간이 어색한 듯 말없이 웃고만 있다.


“다른 분들은 시간 맞춰 오시나 봐요. 잠깐 기다렸다가 시작하시죠.”


리더의 말에 우리는 각자 손에 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자리에서는 대개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농담이라도 주고받을 법하건만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2018년 8월 2일, 그렇게 30대 중반 나이에 처음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언젠가 여름 비 오는 날, 독서모임을 기다리며 카페에서...


독서는 나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고 이 생각 저 생각 상상하는 행위는 삶의 즐거움이었다. 22살(이 책의 모든 나이는 만 나이로 표기한다.) 군대를 전역하고, 무슨 헛바람이 들었는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꾸역꾸역 읽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어려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그 시절 유행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감상문을 적어 올렸다. 그때부터 책을 읽고 미니홈피에 느낀 점을 적는 것은 습관이자 원칙이 되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치이던 스물다섯 신입사원 시절, 출퇴근 지하철에서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완독했다. 사회생활이라는 삭막하고도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느라 연일 파김치가 된 탓에 내용에 흠뻑 빠져들지 못했지만, 돈 받고 남의 일 하는 샐러리맨의 생활 속 독서야말로 오롯이 나를 위한 유일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토지』를, 정확히 말하면 『토지』에 적힌 글자를 열심히 읽어나갔다. 당시 호랑이 팀장은 “토지고 뭐고, 규정집부터 외울 때까지 읽어.”라며 타박했다.


20권이 넘는 『토지』 전집을 읽고 나서는 미니홈피뿐 아니라 사내 잡지에도 글을 올렸다. 하여튼 완독한 책은 단 세 줄이라도 뭐라도 감상문을 남겼다. 미니홈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네이버 블로그로 이어졌다. 내 글에 하나둘 댓글이 달리더니 나의 구독하는 이웃들도 늘어갔다. 그러자 아무렇게나 대충 쓸 수 없다는 일말의 책임감이 들었다. 느낌만 적으면 될 뻔한 작품도 작가와 책에 관한 부연 설명을 찾아 덧붙였고, 그래도 허전하면 작가 사진이라도 집어넣었다. 이런 꾸준함과 노력을 갸륵하게 여겼는지 2018년 1월, 네이버는 나를 문학 부문 ‘이달의 블로거’로 선정했다.


from Pixabay


여기까지가 나의 독서 이력이다. 이 과정은 언제나 혼자였다. 독서는 귀를 막고 활자에 파고들며 분주히 머리를 써야 하는 정신노동이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만큼 당연히 혼자 수행해야 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작가와 대화한다곤 하지만 독자의 자문자답일 뿐이다. 독서는 개인적 영역에 머무는 고독한 취미였다.


고독의 다른 말은 외로움이다. 30대도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싶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타인의 생각이 궁금하면 인터넷으로 리뷰를 찾아보면 된다. 그보다는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과 감정을 공유하고, 즉문즉답을 나누고 싶은 구체적 욕망이 밀려왔다. 지금껏 개인적으로 해온 독서를 이제는 남들과 같이하고픈 마음이 든 것이다. 호르몬 탓인가.


게다가 당시 여자친구도 없고, 주말 아침부터 혼자 카페에 처박혀 책을 읽는 모습은 내가 봐도 답답했다. 뭔가를 하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등산이나 운동을 어울려서 하긴 싫었다. 역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독서다! 남들과 어울려서 읽자.


결심이 서자 부지런해졌다. 당장 인터넷에 접속해 독서모임 카페를 검색했다. 네이버 ‘북카페’라는 커뮤니티에는 독서모임 회원을 구한다는 글이 넘쳐났다. ‘뭐야, 나 빼고 다 독서모임 하고 있었잖아!’란 생각이 들 정도로 구인 글은 많았다.


‘토요일 DMC역 신규 회원 모집’이라는 글에 눈길이 갔다. 시간대도 괜찮고, 집에서도 가깝다. 기존 모임에 합류하는 게 아니라 창립발기인이 되는 거라 위화감도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같은 책을 읽고, 여러 생각을 나누며, 독서 이상의 연대를 꿈꾼다”는 리더의 글이 와닿았다. 연대라…


리더와 나 사이의 침묵은 묵직했다. 리더의 책 앞마구리에는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나도 밑줄 긋고 포스트잇 붙이고 요란하게 읽는 스타일이지만, 그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저럴 거면 왜 붙이나 싶을 정도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 종이들이 빼곡히 운집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때, 한 여자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짙은 눈화장에 구불구불하게 말아 올린 노란색 머리까지 한껏 꽃단장한 젊은 여자다. 90년생 김은혜, 부산 출신의 회사원이다. 두 남자의 고요한 수도원이 김은혜의 등장으로 떠들썩한 예배당으로 변했다.


“그러면 지금은 자취하세요?”

“네. 이 근처에서 혼자 살아요.”

“독서모임은 처음이세요?”

‘아뇨. 사람들 사귀려고 두어 번 해 봤어요. 저처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이런 거라도 해야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깐요.”

김은혜는 활달한 스타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from Pixabay


“저… 독서모임 맞나요?”

3시 정각, 또 다른 여자가 등장했다. 오늘 오기로 한 마지막 회원이다. 선글라스를 벗는 우아한 손짓 뒤로 한 줄기 햇살이 촥 들어온다. 선글라스와 손목에 찬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를 보며 ‘여기 상암동에 사는 전업주부일까?’ 생각했다. 그녀에게선 집안일을 마치고 여유 시간에 카페에 와서 독서모임을 즐기는 중산층 부인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제가 모집글을 올린 백홍서입니다. 원미정 님인가요?”

“네, 맞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정님도 오셨으니 자기소개부터 하고 시작할까요?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나이, 직업 정도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리더의 진행으로 우리 넷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신상을 조금씩 풀어냈다. 리더 백홍서는 36세 남자로 금융회사에서 IT 업무를 담당한다. 혼자 살며 독서와 함께 술을 즐기는 애주가다. 생경하게도 컴퓨터 키보드 수집에도 열심이다.


김은혜는 자기소개에도 주저함이 없다. 강남 신사동에 본사를 둔 화장품 회사의 기획팀 대리로 일한다. 그녀의 지상목표는 현직 교사인 부모님처럼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독서모임도 그 목표 달성의 일환임을 숨기지 않았다.


“저는 원미정이고요, 30대 후반입니다. 회사에 다닙니다. 이상입니다.” 원미정은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고 선언하듯 최소한의 정보만을 노출하며 담백하게 소개를 마쳤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낯선 이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저는 윤태설입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직장은 여의도고요. 독서모임은 처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원미정을 따라 짧게 소개를 마쳤다. 말이 많아 좋을 건 없다. 호칭은 자연스럽게 미정님, 태설님, 은혜님으로 정해졌다. 단, 리더 백홍서만은 리더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우리는 그에게 앞으로 발생할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 첫 선정도서인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저께 문자로 보내드린 발제에 대해 돌아가면서 얘기하겠습니다.”


리더가 선정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오늘 얘기할 책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맨부커상 수상작은 개인의 삶과 직업윤리의 간극을 모던한 필치로 심오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주중에 책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영국 작가의 모던한 소설은 그간 즐기지 않았던 장르다. 그런데 이 책은 뜻하지 않은 감동과 재미를 내게 안겼다. '나라면 굳이 찾아서 읽지 않았을 책'을 읽는 즐거움이 생각지도 못한 독서모임의 효용이었다.


책의 내용보다 놀란 건 토론이었다. 리더의 질문과 식견은 날카로웠고, 다른 회원들의 경험담은 소설의 감동에 살을 붙여줬다. 혼자서 읽고 블로그에 끄적거릴 때와 달리 감상의 폭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만이 ‘함께 보기’를 통해 의미를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상호주관성이라는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고 한다. 이렇게 즉문즉답을 통해 생각이 확장되는구나.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었구나. 독서모임에서 기대한 상호주관성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것이 연대인가.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 가슴이 충만했다. 늦은 밤 리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즐거우셨는지 모르겠어요. 다음 주에도 계속하실 수 있으신가요?’ 망설일 게 없었다. 고독한 은둔의 독서가가 연대의 세계로 울타리를 넘는 순간이다. 눈웃음까지 붙여가며 곧바로 답을 보냈다. ‘다음 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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