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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크너 Dec 05. 2023

[홍대 북클럽 사람들] 03. 새벽녘 황야의 이리들이여

독서모임에 모여든 도시 직장인들의 날것 그대로 이야기

03. 황야의 이리들이여, 새벽까지 울어라


독서모임의 순기능은 비단 독서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모였고, 리더는 연대한다고 했다. 연대의 매개는 회식이고 술이었다. 피 끓는 30대 청년들은 3시간 꽉 채워 열심히 토론했고, 그 배에 가까운 시간을 바쳐 술잔을 비웠다. 새벽 첫 차를 타고 귀가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과 가을을 보내며 우리가 찾은 DMC역 술집들의 숫자는 늘어갔다.


원미정과 김은혜의 주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흥이 많은 김은혜는 술이 술을 부르는지 쭉쭉 마셨고, 원미정은 특유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조용히 소주잔을 연거푸 한 번에 비웠다. 김은혜는 시간이 갈수록 얼굴에 홍조가 드리웠지만, 원미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리더도 술을 좋아한다. 혼자 사는 집에 소주, 맥주는 물론 와인과 보드카까지 없는 술이 없다고 한다. “술과 책이 없었다면 혼자 사는 이 고독한 남자를 누가 위로해 주겠나요?” 단, 호언과 달리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한다. 몇 시간 안 되어 테이블에 쓰러져 잠들었고, 많이 마셨다 싶으면 대번 구역질을 했다. 소주 1병 반이 주량인 나는 적당히 보조를 맞추며 자리를 지켰다. 


from Pixabay


2018년 가을이 깊어갔다. 그즈음 들어온 서희정은 모임 활동에 진심으로 임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그녀는 매사 진지했고, 아는 것도 많았다. 책을 허투루 읽어오는 법 없이 꼼꼼히 읽어왔고, 남들의 말은 사소한 농담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유심히 경청했다. 술자리에서 그녀가 넌지시 내게 말했다.


“태설님, 고맙습니다.”

“네, 왜요?”’

“태설님이 추천하신 이번 주 책,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이게 제 인생책이 되었어요. 너무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평생 두고 읽으려고요.”

“아… 그런가요? 저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혼자 미국을 여행할 때 이 책을 읽으며 히피 정신을 되새기곤 했죠. ‘나는 단독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뭐 그런 느낌이죠.”

“맞아요.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천 개의 자아가 있다’ 이 한마디가 어찌나 마음을 울리던지. 이 한 줄로 지금껏 저의 모든 행동에는 잘못한 게 없었구나, 위로받았어요.”


황야의 이리를 자처하던 서희정은 새벽이 가까울수록 감정이 격해졌다. 술집 구석에서 리더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눈물을 보였다.


“사실 올해 초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요. 집부터 합치고 몇 달 같이 살았는데 서로 예민한 점이 보였던 거죠. 견디다 못해 좋게 얘기하고 잘 헤어졌어요. 반년쯤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활력을 찾아보자 우리 모임에 나온 거예요.” 어느새 우리는 그녀의 얘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남자친구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제가 지금 사는 집은 남자친구 명의이거든요. 남자친구가 평일에는 직장이 있는 지방에 있고, 제가 다음 거처를 정할 때까지 그 집에 있기로 한 거였거든요. 어머님은 저희가 헤어진 걸 최근에 아셨고, 이제 집을 팔아야겠다며 나와달라고 하시네요. 당연히 얼른 나와야죠. 어머님도 당연한 말씀 하시면서도 저에게 오히려 미안해하셨고요. 두어 번 뵙고 인사드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집은 바로 나오면 되는데, 이제 정말 남자친구와의 추억이 끝장나는 것 같아 서럽네요. 그렇다고 다시 만날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그 말을 직접 하면 될 걸 왜 어머니 시켜서 하는 건지…”


서희정은 이내 눈물을 멈추고 담담하게 자신의 사연을 얘기했다. 그녀의 아픈 사연에 우리는 그 어떤 말도 보탤 수 없었다. “앞으로 잘 살면 되죠.”란 말로 건배를 청하며 분위기를 돌릴 수밖에. 그렇게 술잔이 또 늘었다.


from Pixabay


“안녕하세요. 이지현입니다. 만 서른 살이고요, 철을 팔고 있습니다.”

“철을 판다고요?”

서희정이 슬픔을 머금은 황야의 이리라면 비슷한 시기에 합류한 이지현은 들판의 사자처럼 씩씩했다. 토론에서든 술자리에서든 구김살 하나 없는 기색으로 늘 명랑했다. 그녀는 부모님 직업 때문에 유년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대학은 서울에서 국문학과를 나왔고, 현재 국내 굴지의 철강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구리와 철을 판매하는 영업부서에 있다 보니 어디서든 자신을 ‘철 파는 여자’로 소개한다.


몇 번의 회식을 거치며 그녀가 말했다.

“제가 직무 특성상 거친 술자리가 많은데, 와 여기 독서모임도 장난 아니네요.”

이지현의 말에 원미정은 웃으며 말했다.

“독서모임 이거 쉽게 볼 취미가 아닙니다. 돈 많이 드는 취미예요. 술값으로 매주 5만 원은 족히 깨지니, 이 돈만 모아도 까짓 ‘예술의 전당’도 매달 갈 수 있어요.”


회사 선배 김병덕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회사에서 만났지만 한 동네 사는 인연으로 쉽게 친해졌다. 3살 많은 병덕 형은 언제가 사람 좋은 미소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동조하는 따듯한 품성의 소유자다.


한창 독서모임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고 하니 그가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이창현 작가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라는 웹툰인데요. ‘책날개를 펼쳤을 때 저자 소개보다 역자 소개가 긴 책은 재고의 여지 없이 무시한다"는 웃긴 말이 등장하죠. 마침 독서모임을 한다니 한 번 읽어보세요.”


추천받으면 반드시 읽는다는 나만의 원칙에 따라 며칠 후 책을 구해 쭉쭉 읽어갔다. 나처럼 독서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책은 무조건 사서 읽는다. ▲ 도서관이 없는 동네는 인간이 살 곳이 아니다. ▲ 독서는 곧 소설 읽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서에 관한 우스갯소리들이 이어지는 전반부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독서모임 초보자로서 공감 가는 말이 많았다. ‘독서 중독자들은 베스트셀러에 냉담하다’는 말에는 리더 백홍서의 얼굴이 겹쳤다. 그는 베스트셀러를 따라 읽기보다는 부커상 수상 등 검증된 작품만을 읽는다. 제한된 시간에 양서를 읽기도 모자라지 않느냐는 그의 논리에 동의한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뒤표지에 적혀 있듯 ‘B급 감성’이 넘쳐흐른다. 독서 모임을 다룬 전반부를 지나자 만화 속 회원들이 직접 쓴 소설로 배경을 옮기며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갑자기 괴물이 나오는 등 맥락 없는 스토리 전개를 내 취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책장을 덮고 병덕 형에게 카톡을 보냈다. “책 잘 읽었습니다. 독서모임의 여러 원칙들이 공감 가더군요. 그런데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한 가지 추가할 말이 있습니다. ‘독서모임은 술을 잘 마실수록 좋다’.”


from Pixabay


2019년 새해가 밝았다. 그 겨울, 우리는 하얗게 눈에 덮인 DMC의 밤을 헤매며 무수히 많은 술잔을 비웠다. 웃음꽃이 만발했고, 농담과 험담을 나누었다. 이따금 눈물과 분노도 주고받았다. 무질서하게 뿜어낸 말의 파편은 허공으로 흩어져 이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건만 말이다.


만물이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봄이 찾아왔다. 우리의 책은 짧은 단편과 장편을 넘어 급기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로 이어졌다. 600쪽 책이 상중하 3권, 이 거대한 이야기는 원미정이 추천했다. 너무도 유명해서 읽고 싶었지만, 너무도 길어서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 독서모임을 통해 강제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고 한다. 나는 예전에 읽었지만, 이참에 한 번 더 나의 봄을 『안나 카레니나』에 바쳤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날, 우리는 책걸이라며 또 다시 술잔을 부딪혓다.


날씨도 좋고, 책 읽기도 속력을 받던 어느 날 서희정이 말했다.

“저 오늘이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습니다. 의정부 집도 정리했고, 새 학기부터 경기도 포천 시골 마을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너무 외진 곳이라 물리적으로 매주 오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교사를 시작하면서 품은 제 오랜 꿈은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도시를 벗어나 산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저도 성장하려고요. 여러분 덕분에 지난겨울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부디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황야의 이리는 떠나갔다. 저도 덕분에 많은 걸 얻었습니다.


만개한 벚꽃과 함께 박재문이라는 남자가 모임을 찾았다. 동갑내기 친구의 입회를 환영하며 리더와 나, 박재문이 술자리에 모였다. 남자 셋은 반갑다며 한 잔, 날이 좋다며 한 잔, 연거푸 막걸리를 비웠다. 어느덧 빈 병이 9병으로 늘어났다. 똑같이 나눠마셨으니 혼자 막걸리 3병을 마신 거다.


자정이 훌쩍 넘었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했다. 더는 마실 수 없어 비틀거리며 택시를 탔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잠시 차를 멈춰 세우고 전신주 앞에 섰다. 손가락을 집어넣고 속을 비워냈다. 눈물 콧물이 쏙 빠져나왔다. 택시 뒷좌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생각했다.


 ‘지금 잘살고 있는 거 맞지? 이 나이에 여기서 이렇게 무의미하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거지? 이게 ‘황야의 이리’로 사는 모습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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