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루를 찾아서
보세요
차디찬 이별의 말끝에 매단 서슬이 제 흉부를 박박 할퀴는 동안에도 전 아무렇지가 않았습니다 당신 입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요 당신 입이었다면 더 금세 잊었을까요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그게 더 쉬웠을 거예요
보세요
헤이리 예술마을에 핀 눈부시도록 붉은 단풍들 속에서도 전 웃질 않았습니다 당신이 제 곁에 없었으니까요 제 곁에 계셨다면 분명히 함께 웃었을
당신 마음씨를 닮은 예쁜 물결이 차례로 마을 어귀부터 전체를 휩싸고 감싸는 동안에도 제 바람의 물결이 쉽사리 잦아들지가 않았습니다 미련일까요 긍정일까요 아니면 극복일까요 망각의 힘은 늘 무한대여서 그저 흐르도록 놔둘 뿐이죠
철 지난 단풍잎 몇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고 커피를 마신 채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당신을 만나기라도 하면 보여주고픈 붉은 마음이 단풍을 꼭 빼닮아서였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립다는 말일 거예요 보고 싶다는 말일 거예요
보세요
한창인 은행잎들이 물결처럼 쓸려가는 동안에도 내내 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저녁을요 노을이 환하게 내비치면 제 낯빛에도 얼른 주황빛 물결이 넘실대고 익어가는 단감의 빛을 따라 어쩌면 추억의 색채도 그리 향기로울 수 있었겠는지요 그 시절이 아름다웠음은 분명해 보여서요
보세요
다시금 내딛는 제 발걸음을요 천천히 소리도 없이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무언가의 흔적을 쫓듯 발끝만을 응시한 채 입을 다무는 시간을요 기억도 소리없이 찾아온 다음 저만치 어둑어둑한 하늘의 색조로 다시 무겁게 침잠하는 듯한데
어쩌면 이 저녁이 또다른 아침을 맞을 준비인지요 그걸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내내 기다려볼 참이에요
한참을 더 기다릴 거예요
한참을 더 그리워 할 것 같고요
한참은 더 그대를 사랑하니까요
# 단정,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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