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책'
책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 (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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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인 :
누구나 한번쯤은 좋아하는 시인을 물어보았고, 또 대답했었을 일들인데 매번 똑같은 질문을 겪으면서도 매번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기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시세계가 존재하며, 또 그만큼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교차하는 삶이라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꺼내 읽는 시집의 권두시인 '책'은 아주 오랫동안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처럼 늘상 소중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소중함을 제대로 일깨운 적 없는, 그저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기만 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그런 무심함이 때로는 필요하고 또 때로는 더 서운할 일도 생깁니다만)
벌써 오월의 하순입니다. 날씨는 제법 여름 같은 기운을 풍기고, 또 밤부터 새벽 동안은 내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기후변화 탓에 제법 눅눅하기만 한 새벽 공기였는데 이제야 서늘한 기운도 좀 생겨나는 모양새입니다.
최근에 가장 자주 읽었고 또 가장 정감어린 시구들로 눈길을 끈 시인은 불과 두 권의 시집만을 남겨놓고 '제 살 길'을 찾아 이미 떠난 사람입니다. 뒤늦게 짝사랑을 하듯 그의 족적들을 훑는 일은 그래서 괜시리 고색창연하기도 하며, 그래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의 말처럼 시인이 풍긴 분위기는 '낙엽 냄새'가 묻어난다고도 하던데, 허수경의 초기 시편들이 갖던 낭만성과도 제법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모진 상상도 좀 보태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