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천,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늦었네.
겨우 한 뼘 햇살이 드는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말리며 너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 몰랐네.
몇 번이나 불렀을까.
하긴 이름도 모르는데,
대답도 없이 등지고 있는 네가 보였어.
반쯤 열린 서랍 속에 어지럽게 놓인 하얀 봉투들
내려다보고 있는 네가
거기 저만치
서 있었지.
아주 조금만 더
적막의 시간을 견뎠다면 정말 그랬다면
또 다른 아침을 볼 수 있었을까.
때를 맞춰 일어나지 못했던 구제불능
밀랍처럼 마음이 굳어 갈 때도 간절했던 생각
그냥 아프지 않게
매달리는 법
함부로 손을 모아 본 적 없는데
이번만은
손과 발도 깨끗이 씻고 갈비뼈 위로 성호를 그었지.
사원을 닮은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미처 적지 못한 이야기를 누가 들었으려나.
창틈으로 이따금씩 비린내가 났지.
끊임없이 생각을 넘보는 바람의
혀가 몸을 핥는 것 같았어.
그리고 사이렌 소리
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지.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아주 조금씩 말라 갔지.
네가 천천히 쓰다듬어 준 하얀 내 얼굴
처음으로 사랑한 슬픈 내 얼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넓은 내 이마
그 위로 햇살 한 줌 내려앉았지.
이젠 정말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가 없네.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지.
핀 줄도 몰랐던 율란
한 잎
한 잎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
# 여태천, 집 없는 집 (민음, 2025)
...
'민음의 시' 332호 :
시나브로 '민음의 시' 시리즈가 벌써 332호째를 맞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시집만으로 300호째를 넘긴 출판사들도 이제 총 네 군데가 됐군요... (600호째를 이미 넘긴 문지시인선과 역시 500호째를 넘긴 창비시선, 그리고 300호째를 넘어선 실천문학시집선과 332호째인 민음의 시 등이며, 문학동네시인선은 아직 236호째를 맞고 있습니다.) 잘 팔리는가 여부를 떠나 그만큼 뚝심 하나로 긴 세월을 버텨낸 일등공신들이며, 앞으로도 장수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출판사들이죠.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의 시리즈들도 계속 분발해주기를 바랍니다.
여태천 시인은 이제 오십대 중반에 접어든 2008년도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 출신이고요. 이번이 다섯 번째 시집인데, 그동안의 과작이 작품의 질과는 또 전혀 무관한 까닭에 오히려 시인의 시선에 집중하기에는 더 좋을 법도 합니다.
"마지막 인사"로 "등지고 있는 네" 모습을 미처 감지하지 못한, "적막의 시간" 동안에도 "미처 적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놓지 못한 시인은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가 없"는 상태로 누워 율란(목련의 일종?)이 지는 모습만을 바라봅니다. 가장 무기력한 풍경을 무덤덤히 담아낸 듯한 시인데, "처음으로 사랑한 슬픈 내 얼굴" 위로 "햇살 한 줌 내려앉았"다는 묘사는 그 무기력함을 오롯이 상징할 뿐이고요.
때이른 장마가 시작된 유월 중순이기도 합니다.
한 주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