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유월이 오면'
유월이 오면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 도종환, 접시꽃 당신 (실천,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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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중턱을 넘어서면서 :
도종환 시인의 옛 시집인 <접시꽃 당신>을 모처럼 꺼내듭니다. 기억하기로는 역대 최다 판매량 2위?를 기록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잘 알려진 바대로 문예지나 신춘문예 같은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난 1984년에 한 동인지인 <분단시대>를 통해 '고두미 마을에서' 등의 시편을 발표하면서 처음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분이죠. 1위인지 3위인지도 정확하진 않은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또 다른 시집인 <홀로서기>를 쓴 서정윤 시인 역시 '비등단'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공교롭지만 1~3위 모두가 다 '비등단' 출신이기도 하네요... 박노해 시인까지죠.)
시인으로는 정한모 시인에 이어 두 번째로 문화체육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었는데, 소설가 출신으로는 이에 앞서서 김한길 장관과 이창동 장관이 또 평론가 출신으로는 더 앞서서 이어령 장관 등이 있겠습니다. 또 생각을 해보니, 문단 역시도 정치의 높고도 긴 파장에서 그리 크게 자유롭진 못했던 듯합니다. 시인은 또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점으로도 유명합니다.
유월을 노래한 수많은 시편들 중 굳이 도종환 시인을 고른 건 일단 유월이 갖는 상징성 하나만큼은 이 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또 상당 부분 이 진영을 대표할만한 시인이기도 해서죠. (물론 또 다른 유명한 시를 쓴 김용택 시인도 있겠습니다만) 시의 정신이 '시대정신'과 부합하느냐의 여부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요 난제인데, 잠정적인 결론으로는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 정도일 거예요...
"뻐꾸기만" 울고 "감자꽃만" 피어나는 "산속"에서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저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부끼는 모양입니다. 애처롭습니다.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이라는 시구 역시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처연함일 뿐입니다. 그 처연한 그리움의 연원은? 다름 아닌 "반쪽" 즉 "당신의 몫"일 뿐이고요.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하는 시인은 그래서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언젠가 '그리움' 또는 '쓸쓸함'이 갖는 감정적 연원을 살펴보다가 '상실'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즉, 그리움과 쓸쓸함 따위의 감정들은 어쩌면 '상실'의 몫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부터 해본 듯합니다. 무언가를 '상실'하면서도 끝끝내 삶을 지탱하고 이어나갈 몫은 모두한테 있으며, 다만 그 감정의 연원을 살펴보는 일과 그것을 찾아 헤매는 일 또한 어쩌면 끝끝내 지워지지 않을 흔적과도 같은 종류여서 연신 눈에 밟히기만 합니다.
장마가 시작된 탓에 아침부터 하늘이 뿌옇고 흐리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