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책과 공간경험이 같다고요?
어느 날 나는 '책의 경험을 설계하는 편집'이라는 강연을 듣게 되었다. 강사님은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유지태의 펜트하우스와 어느 부동산에서 매물로 올려놓은 펜트하우스를 비교하며 설명하셨다.
"이 두 개의 펜트하우스 영상을 보시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 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딱히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조용히 있었다. 앞줄에 앉은 <적극적인 여성분>이 손을 들었다.
“집의 목적이 다른 것 같은데요? 유지태의 집은 물이 흐르고 싸우기 좋게 되어 있고요, 부동산 매물은 채광이 잘 되고 뭔가 포근해서 실제 거주하기 좋을 것 같고요."
뒷줄의 또 다른 분이 손을 들었다.
“제 생각엔 유지태의 집은 공간이 다 트여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방으로 연결되는 데, 부동산 매물은 공간이 다 분리되어 있고, 현관에서 방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강사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렇죠? 두 집은 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그 구조가 다른데요. 만약 이 집들이 책이라면 각각 어떤 책일까요? 책을 만드시면서 독자가 그 공간을 경험하는 듯한 직접적인 분위기를 상상해 보신적 있으신가요?"
나의 대답은 '없다.'였다. 나는 그냥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이것저것 하고 있을 뿐이지, 특별히 전략적으로 분석해 본 적은 없다. 이 강의는 새로운 관점을 선물해 주고 있는 듯했다. 강사님은 계속 강의를 이어갔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면 무엇이 독서 경험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요? 책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 바로 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을 만들기로 했다면 오늘부터 여러분의 읽기는 달라져야 합니다. 전에는 독자로서 책을 읽었다면 오늘부터는 '어떤 걸 상대에게 전해주고 싶은가?'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즉 편집자의 눈으로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죠. 그런 연습이 계속 쌓이면 결국 기술이 됩니다."
강사님은 예전에 영화감독을 꿈꾸셨다고 하는 데, 그 경험 덕분인지 책을 만드는 것을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먼저 독자를 중심에 두고, '어떤 영화를 보여줄까?'를 구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 나는 어쩐지 책을 만드는 일이 내가 사람들의 삶에 기여할 수일인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았고, 할 수 있는 만큼 더 섬세하고 싶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럼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책은 어떤 책이지? 독자는 누구로 할 것이고, 어떤 경험을 선사해 줄 수 있지?' 하며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편집은 전략을 갖고 만들어야 합니다. 책에는 그 책에 맞는 목적이 있어요. 독자를 위해 '어떻게 원고를 정리할까?' 하는 문제는 결국 차례와 편집 구성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할까?' 를 고민하는 것이죠. 책을 만드는 것은 독자가 필요로 하는 경험을 시각화하는 것입니다. 책에 따른 경험은 3가지 형태로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제작 사양, 판형, 종이 선택, 무게감, 제본 방식 등의 '물성으로의 책'이 있고, 시각디자인과 본문디자인과 같은 '디자인', 마지막으로 컨셉, 제목, 부제, 카피 등 '내용으로의 책'이 그것입니다. 이 3가지가 독자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죠."
나는 앞으로 이 3가지 관점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보다 심혈을 기울여 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여러분께서 제게 '책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나요?'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먼지를 쌓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책을 만들고 글 쓰는 일이 늘 그렇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으면 글이 잘 써집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티가 나는 것이죠. 편집도 동일합니다. 분석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경험해 봐야 여러분께도 먼지가 쌓이겠죠? 도서관에 가셔서 먼지를 쌓듯이 책을 분석하는 경험을 많이 쌓아보세요."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먼지처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말.
나는 아무래도 실패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다. 완벽하게 하려는 마음이 늘 행동할 기회를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노트에 '먼지처럼 작은 경험을 소중히 하자.'라고 적었다.
"특출난 사람은 없어요. 노력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죠. 트렌드는 계속 바뀝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책 만드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먼지를 쌓으면 할 수 있습니다. 불안해하지 말고 자신만의 작은 점을 계속 찍어나가세요."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고, 강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강사님은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강사님이 예전에 컨셉을 잡고 기획한 책 시리즈 중에 인기가 많았던 시리즈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적극적인 여성분>이 질문했다.
"강사님, 혹시 강사님이 기획하신 인기 시리즈 탄생 비화를 좀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기획했고, 어떻게 탄생했는지요?"
"제가 당시 기획할 때 그 시리즈는 20대~30대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일상의 소소함을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상 인물 A를 설정하고, 고객 프로파일링 기법을 활용했어요. A와 관련된 취미, 부동산, 스트레스 해소법, 셀프인테리어 등과 관련된 책을 계속 펴낸 것이죠."
독자를 프로파일링한다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꽤 창의적인 관점이라 생각했다. 나의 독자는 누구이고, 어떤 걸 좋아할까? 한 번쯤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의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