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무료로 연극을 보여드려요. '연극 산책'
6월 15일부터 7월 3일까지 제주도에서 국내 최대 규모 연극 축제인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가 개최되고 있다. 전국 시도 16개 지역 대표극단이 참여해서 본선 경연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관객들은 어떤 공연이든 오후 3시 타임 공연을 예매하면 무료로 연극을 볼 수 있다.
문예회관 홈페이지를 보다가 나는 '대한민국연극제'가 열리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 제주 곳곳의 도로를 달리다가 현수막이 걸린 걸 보긴 했었지만,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해서 그냥 지나치고 있던 차였다. 나는 전에 문예회관에서 ‘우리 읍내’라는 연극을 관람한 후로, 종종 문예회관 홈페이지를 통해 좋은 공연이 올라오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이제야 대한민국연극제가 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혹시 내일 문예회관에 연극 보러 가실 분 계세요? 3시 공연은 무료래요."
나는 언니들과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승마팀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우리는 요새 몇 번 봤어요."
왕언니 미자언니가 답문을 보냈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가요. 잘들 지내시나요? 용희 씨 내일 갈 거면 끝나고 나서나 시작 전에 만나서 차 한잔 해요."
역시 미자언니는 행동이 빠르다.
"저도 내일 좋아요. 용희 씨 같이 예매해 줘요. 전 끝나고는 바로 가봐야 해서 공연 전에 뵙는 게 좋아요."나는 혜수 언니의 말에 연극표를 2장 예매했다.
그렇게 미자언니, 언니 남편 김반장 님, 그리고 혜수 언니와 함께 나는 ‘산책: 신채호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관람하기로 했다. 연극 포스터를 살펴보니, 산책은 대전광역시 <극단 새벽>이 공연하는 것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신채호의 삶과 그의 아내 박자혜 님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공연이라고 했다.
'좀 무거운 내용이려나?'
포스터만으로 생각해 봤을 땐, 독립운동도 나올 것이고 일제도 나올 것이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도 나올 것 같았다.
나는 평소에 연극을 관람한 횟수가 그리 많지 않다. 기억나는 연극은 아마 한 3편 본 것 같다. 그래서 좀 무거운 내용이더라도 오늘 기쁘게 관람하기로 했다.
내가 연극을 많이 관람하지 못한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 그랬다. 서울에 있을 때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좀 봤으면 좋았겠지만, 사람 많고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대학로에 거의 가지 않았고, 역시 그래서인지 아직도 습관이 되지 않은 행동은 갑자기 하기 좀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제주에서 처음으로 관람한 연극은 제주대학교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우리 읍내'라는 연극이었다. 그때도 '우리 읍내'는 오늘 방문할 문예회관에서 공연됐었다. 당시 나는 '우리 읍내'가 제주에서의 첫 연극 관람이어서, 처음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괜찮을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많이 올지?’의 문을 가지고 방문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극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배우들의 연기는 내가 대성통곡을 하고 나올 만큼 환상적이었다. 그 첫 기억이 좋아 그 뒤로도 나는 문예회관을 종종 방문한다.
신기하게도 나는 '우리 읍내'를 관람한 후로 연극계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몇 명 알게 되었다. 한 때 배우를 꿈꾸다가 지금은 공무원이 된 <영 언니>도 그중 하나이다. 언니는 늘 내게 이런 말을 해준다.
"용희 씨,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면 삶이 더 좋아질 거예요. 저도 문예회관에 근무했던 적이 있는 데요. 계속 듣다 보니 처음에는 잘 안 들리던 클래식도 익숙해지고 좀 더 섬세하게 들을 수 있더라고요. 역시 문화 예술은 듣고 보고 체험하면서 생활에서 즐겨야 되는 거예요. 경험치가 높을수록 인생에서 즐겁고 즐겁지 않고의 자신만의 기준이 더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경험이 높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고 결국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이기도 하죠. 저는 궁극적으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게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해요."
나는 <영 언니>의 말씀을 받들어 오늘 '산책: 신채호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통해 내 인생의 경험을 넓혀보리라 다짐했다.
"우리 커피 마시자. 이따 연극 보다가 졸면 안 돼."
문예회관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 데, 김반장 님이 말씀하셨다.
"연극제라 그런지 연극 내용이 좀 무거워."
김반장 님의 말에 우리는 다 같이 커피숍으로 가서 몸에 카페인을 가득 채웠다.
카페에서 나와 문예회관에 주차를 하려는 데 오늘따라 유독 주차장이 만석이었다.
"오늘 공연 인기 많나? 어제는 주차 자리가 비어 있었는 데..."
최근에 공연을 자주 보러 온 미자 언니가 말했다.
나는 주차장을 두 바퀴쯤 돌다가 절대 안 나갈 것처럼 다소곳이 주차해 놓은 차량 한 대를 발견했다. 나는 이 차의 다소곳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녁때까지 절대 안 나갈 것 같은 어떤 확신이 들었다.
과감히 그 앞에 차를 세우고 혹시 폐가 될까 봐 뒤차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뒤 차 주인이 앞 차 주인의 전화를 받는 게 다소 황당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오늘 늦게까지는 안 나간다고 했다. 나는 연극만 보고 차를 빨리 빼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차 주인이 뭐래?"
옆에 있던 미자언니가 물었다.
"늦게 나가신다고 걱정 말래요."
"다행이다. 차 여기 댈 데도 없는 데..."
그렇게 어렵사리 주차를 마치고 문예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예회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티켓을 수령하고, 포토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제법 큰 행사 분위기가 났다.
인★를 하는 나와 혜수 언니는 서로 번갈아 가며 최대한 예쁜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다. 인물사진을 잘 찍는 혜수 언니가 전신사진을 찍어 줄 때 자연스럽게 찍혔으면 좋았겠지만, 역시나 내 다리의 각도가 너무나 어색했다. '너는 왜 사진만 찍으면 똥폼을 잡는 거야?' 어디선가 모자리나 언니의 타박이 들려오는 듯했다.
"인플루언서 되기 어렵네요."
머쓱해진 나는 웃으며 혜수 언니에게 말했다.
공연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팸플릿을 보며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연극 내일도 하고 모레도 하고 일요일까지 계속하네요?"
혜수 언니가 말했다.
"네, 언니. 여기 각 지역의 팀들이 계속 경합하는 것 같아요."
"그럼 우리 오늘 보고 괜찮으면 다른 연극도 봐요."
나는 언니의 말에 그러자고 했다. 무료 연극이니까 크게 부담도 없고 양질의 연극도 볼 수 있고 정말 좋은 행사이다.
막이 오르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처음은 신채호 선생이 감옥에서 보석을 거부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신채호 선생의 부인인 박자혜 님 역할을 맡은 여주인공의 발음과 연기가 좋았다. 배우들이 마이크를 달지 않고 있는 데도 목소리가 관객석까지 잘 들리는 게 굉장히 신기했다.
'마이크가 어디 천장에 달려있나?'
나는 천장을 쳐대 보았지만 마이크는 보이지 않았다.
‘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을까? 배우란 직업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나는 이 연극을 통해 신채호 선생의 부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우리에게 신채호 선생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부인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데, 연극에서는 조선시대 궁녀출신으로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궁 밖으로 나와 숙명여학교에서 수학하고 간호사가 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 뒤 일제를 위해 일할 수 없다며 간호사를 그만두고 3.1 운동에 동참했다고 했다.
연극에서 그녀는 신채호 선생을 존경하는 부인의 모습으로 나왔는 데, 대사에서 그녀의 인생은 궁에서 나와 공부하고 지금까지 특별히 재미난 모험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눈에 글을 쓰고,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의 큰 뜻이 얼마나 숭고하게 보였을까? 자신의 삶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신채호 선생의 생활은 늘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던데, 부인께서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돌봤다고 했다.
이 연극의 특징은 연출이 굉장히 돋보인다는 점이었다. 배우들이 단체로 함께 호흡하고 춤추고 하는 앙상블 연출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특히 배우들의 움직임이 꽤나 자유로우면서도 합이 잘 맞았다.
‘이 극단에서 연기하려면 춤을 잘 춰야겠네... 연습하기 정말 힘드셨겠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에선 박수가 절로 나왔고, 3.1 운동을 하다가 총에 맞는 장면에선 총소리가 너무 리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좋았는 데, 신채호 선생이 죽고, 아내도 하늘나라로 가는 장면이었다.
모든 연기자가 등을 들고 다리를 건너와서 신채호
선생과 부인 옆에 춤을 추듯이 있다가 함께 강을 건너는 장면이었다. 무대에 조명이 다 꺼질 때까지 등 불을 들고 끝까지 긴장감 있게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극을 관람하고 나오며, 나는 미자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이 연극 괜찮지 않아요? 이 정도 연출이면 몇 위 정도 할 것 같아요? 먼저 보신 다른 연극들은 어땠어요?"
"잘은 모르겠는 데, 중간정도 아닐까? 다른 연극들이 워낙 쟁쟁해서 말이야. “
“헉 진짜예요?”
나는 이 연극이 좋아서 우승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연극들이 다 쟁쟁하다니 연극제가 끝나기 전까지 연극을 몇 편 더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장 와서 보니까 연극 재밌지? 우리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계속 예매했는 데, 용희 씨도 궁금하면 같이 보자. 일요일에 하는 연극은 19금 이던데?"
"혹시 그 연극은 무섭게 19금 아니에요? 막 고문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죠?"
나는 이 연극제의 주제들이 많이 무겁다는 김반장 님의 말을 상기하며 말했다.
"저는 가볼래요. 저는 원래 무서운 것도 잘 봐요."
옆에 있던 혜수 언니가 말했다.
"그 19금 진짜 무서운 거면 실망할 거야."
미자 언니가 말했다.
'으... 나는 어쩌지. 나는 무서운 19금은 못 볼 것 같은데?'
나는 분명 일요일 연극이 무섭거나 잔인한 19금 일 거라 생각하고 언니들이 19금 연극을 보고 돌아오면 어떤 연극이었는 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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