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러스트 그리기 좋은 날
"작가님, 이제까지 낸 책은 인세가 얼마나 나와요?"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업가 한솔님의 질문이었다. 나는 첫 만남에서 그에게 '책 없는 김 작가'라고 나를 소개했었는 데, 바쁜 일상에 쫓기는 그는 아마도 내가 몇 권의 책을 낸 작가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인 끝에 그가 민망할까 봐 웃으며, "별로 안 나와요."라고 답했다.
그는 예상했던 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게 첫 책이에요."
나는 지금 작업 중인 승마책 샘플을 내밀었다. 그제야 그는 내가 책 없는 작가라는 걸 떠올렸는지, 미소를 보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해 온 사업가에게 책 없는 작가는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보일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두서없이 내 얘기를 꺼냈다.
"저는 원래 제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꺼내 쓰고 싶을 때마다 오히려 위험하다고 자신을 많이 눌러왔었죠. 아닌 척하면서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편해요.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요..."
나는 항상 프리랜서의 삶을 꿈꿨었지만, 그걸 어떻게 무엇으로 구현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살다 보니,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게 그냥 가장 신기할 따름이다.
"책 내용은 이제 다 마무리가 되었고요. 어제 교정 교열도 다 마쳤고... 지금은 일러스트만 그리면 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선은 다 따놨었는 데... 지쳐서 잠시 쉬었어요. 거기 표지에 있는 말 제가 그린 거예요."
"어? 이걸 직접 그리셨다고요?"
한솔님은 별 다른 감정 없이 내 책을 들춰보고 있다가 표지의 말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네, 제가 그린 건데 일러스트는 괜찮은 데 표지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한솔님은 학창 시절에 미술을 했어서 그림에 조예가 깊다. 나는 원래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편하게 내 일러스트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건넨 일러스트들을 천천히 살피면서 말했다.
"저기, 제가 절대라는 말을 잘 안 쓰는 데요...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 그림은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은 절대 그릴 수 없는 그림이에요."
"진짜예요? 왜요?"
"이 그림을 보여주고 이렇게 똑같이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는 있겠지만, 그냥 말 타는 사람을 그려보세요. 하면 이런 그림이 절대 안 나오죠. 재밌네요."
나는 무슨 이야기 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냥 '초짜라서 그림이 더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긴 얼마 전에 미대 나온 언니도 제게 이 표지말이 가장 좋다고 했었어요. 다른 말 그림도 보여드릴게요."
나는 그간 그렸던 많은 말 그림을 한솔님께 보여드렸다.
"이 말들이 표지 그림 이전에 그린 말인가요?"
"아뇨. 표지 그림 후에 그린 말인데요. 그림이 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했나요?"
나는 뭐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 아예 감이 없다.
"네. 다른 말들보다 처음에 그렸다는 표지 말이 제일 재밌는 데요. 자세히 보면 표지 그림이 비율이 하나도 안 맞고, 구도도 안 맞거든요. 그런데 이 그림 묘하게 매력 있어요."
"그런가요? 하긴 미대 나온 언니한테 물었을 때, 원래 처음에 그린 그림이 제일 나은 법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미대 나온 혜수 언니도 표지 말이 제일 낫다고 했었고, 한솔님도 표지 말이 좋다고 하니 그냥 이 말로 빨리 일러스트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일러스트 작업도 슬슬 지겨워지려던 참이다. 얼른 끝내지 않으면 좀 지쳐버릴 것 같다. 어쨌든 한솔님은 원래 칭찬을 잘 안 하는 냉정한 사업가 타입인데, 무뚝뚝한 그에게 좋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말이 제일 오래 걸렸고, 다른 그림들은 그래도 말만큼은 오래 걸리지 않더라고요. 아침에 한참 그림 그리다 나왔거든요."
나는 색연필로 그린 다른 그림들도 보여드렸다.
"그림이 다 뭔가 작가님하고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나는 나랑 어울리는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감이 없었지만 한솔님의 긍정적인 반응에 기뻤다. 집으로 돌아와 말 그림 6장과 책에 들어갈 일러스트 20여 장을 그렸다. 엄지 손가락이 아파왔다. 승마 장갑을 그리고 싶었지만 선이 잘 안 따져서, 내 손을 대고 그냥 선을 땄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린 A4 용지 크기의 장갑 그림이 나왔다.
한참 승마 장갑을 칠하고 있는 데 희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비 오지만 걸을까?"
나는 요즘 장마가 와서 운동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고, 엄지 손가락도 통증이 밀려오던 차에 언니의 연락이 반가웠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네. 좋아요. 언니."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부지런한 언니는 이미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잘 지냈어요?"
매일 만나던 희 언니와도 2주 만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고 처음 만나는 언니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 아팠어."
눈이 떼꾼해진 언니는 그간 몸이 좀 아파서 고생했다고 했다.
"걸을 수 있는 거예요?"
"응, 나 요즘 계속 걸었어. 괜찮아."
나는 언니와 이런저런 밀린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둘레길이 반가웠다. 아침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작은 개천은 폭포가 되어 있었고, 분홍 낮 달맞이꽃도 봉오리를 닫았다. 귀여워서 사진을 찍으려다가 오늘은 언니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가 오면 왠지 혼자 걷기 싫더라고요. 언니, 저 그간 완성한 일러스트 보여드릴까요? 이런 거 그렸어요."
언니는 내 일러스트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언니도 요즘 나처럼 색연필화 그리는 걸 연구 중이라 뭔가 통하는 게 있어서 좋다.
"난 자기 그림 좋아. 김 언니도 자기 그림 잘 그린다고 화실 나오라고 했었잖아."
"저는 그리다 보니 너무 깊게는 못하겠고 그냥 이 만큼만 할 거예요. 색연필화 재밌는 것 같아요. 파브리아노 브리스톨 지가 워터 색연필 그리기엔 제일 낫던데요. 종이에 따라 색연필이 잘 입혀지고 안 입혀지고 그러던데..."
"그래?"
얼마 전 언니도 나와 같은 수채 색연필을 구매해서 사용 중인데, 언니는 내가 말한 종이 이름을 폰에 입력했다.
"자기야, <블랙이쉬레드>라는 카페 가봤어? 애월에 있는 카페인데 얼마 전에 나 다녀왔거든. 여기 통창이라 숲 뷰가 보이고, 눈도 시원하고 의자도 편하고 정말 좋아. 우리 한 번 갈래?"
언니는 블로그에 올라 있는 카페 리뷰를 보여주며 말했다. 카페는 크고, 넓고, 하얗고, 의자도 푹신해 보이고 무엇보다 통창으로 보이는 숲 뷰가 엄청 예뻤다.
"정말 좋아 보이는 데요... 저 갈래요. 카페에 가면 왠지 영감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 사람들이 책 가져와서 한참 읽고 간다. 연인들도 많이 오고... 무엇보다 카페가 넓어서 오래 있어도 눈치도 안 보여. 그리고 내가 앉았던 자리가 아마도 포토 스폿인가 봐. 사람들이 사진 찍으려고 계속 기다리더라고... 아침 10시에 가면 사람도 없고 좋던데... 우리 한 번 가자."
"좋아요, 언니. 그럼 우리 갈 때 색연필 챙겨 갈래요? 색연필화 그리는 거 어때요? 야외 나가서 그림 그려보고 싶은 데. 저의 로망."
"그건 좀..."
"하긴, 색연필화 그리면 연필 찌꺼기 많이 나오니까 주인이 싫어하려나..."
나는 그래도 언니와 함께 밖에서 그림 그리면 재밌을 것 같은 데, 못내 아쉬웠다.
"음... 다음 주 수요일 어때?"
"저 좋아요. 다음 주에 가요."
그렇게 나는 언니와 <블랙이쉬레드>라는 카페에 갈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일러스트 그리기가 슬슬 힘겨워지려던 차에, 카페 가서 색연필화를 또 그리겠다니... 내가 일러스트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집으로 왔다. 오늘 아마 일러스트를 너무 많이 그려서 아마도 내가 넋이 나가버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