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오랜 친구들이 종종 나를 찾는다. 수화기 너머로 반가운 전화를 받을 때면 놀라움과 함께 친구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일은 늘 반가움이 함께하고, 또한 그들에게서 예전의 나를 만나는 것도 꽤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의 행복함은 단지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나는 꽤 잘 살아왔구나.' 하는 안도감도 함께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점에서 행복은 두 배가 되는 것 같다. 오랜 친구가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와 준다는 것은 아마도 '예전의 어린 내가 지금의 나를 소환할 만큼 내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며 스스로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과장님, 어떻게 지내요?
수화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하니 탐장님이셨다.
어머 어머 어머.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너무 놀라 그저 추임새만 보낼 뿐이었다.
하니 팀장님과 나는 일하면서 각별한 사이였다. 우리에겐 지난 시절을 함께 보낸 전우애 같은 게 있다. 서로 마음이 잘 통해서 가끔 쉬는 날 함께 산에 가고, 서점에도 같이 가던 친한 사이였다. 팀장님은 영국을 좋아하셨는데 외국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많은 나와 잘 통하기도 했고, 우리는 일하는 스타일도 비슷해서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믿어주는 그런 사이였다.
지난 8년간 우리는 서로 연락이 없었지만, 다시 못 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 기간 동안 팀장님과 나는 그저 서로 언제 연락해도 편하게 받아줄 사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저 제주도 왔어요.
팀장님의 첫 마디는 내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아, 제주. 제주에 계신다면 꼭 뵐 수 있지.'
늘 생각하지만, 제주는 옛 친구를 만나기에 아주 좋은 장소다. 누구나 편하게 훌쩍 떠나 한 번 올 수 있는 그런 곳. 나는 문득 내가 제주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
이번 주에 시간 되세요?
그럼요. 되죠. 되죠.
그렇게 우리는 어느 금요일 구좌에 있는 '카페 라라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와. 여기 좋은데요?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첫 마디였다. 나는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일단 주차장이 널찍해서 마음에 들었고, 세화 해수욕장 바로 앞 높은 곳에 있어서 쉽게 바다 전망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카페는 나무 계단을 올라서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올라가면서 신기하게도 작은 물방울이 날리는 게 보였다. 나는 '어린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불고 있는 걸까?' 생각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카페 앞 비눗방울 기계에서 쉬지 않고 비눗방울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예쁘고 신기했다. 나는 앞장서서 카페로 들어가시는 하니 팀장님의 뒷모습 사진을 찍었다. 비눗방울이 예쁘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햇빛이 눈 부셔서 확인은 잘되지 않았다. 부족한 내 사진 솜씨일지라도... 그래도 오늘은 사진을 꼭 남기고 싶은 그런 날이다.
팀장님, 여기 어떻게 아셨어요? 넘 맘에 드는데요?
그전부터 한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요. 계속 못 와보다가 오늘 이렇게 와보네요.
카페 입구는 낡은 자전거와 빨간 우체통,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액자 모형이 진열되어 있었다. 액자 뒤로 보이는 세화해수욕장이 제주 감성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이야, 여기 정말 예뻐요.
예쁘죠? 저도 맘에 드네요.
우리는 카운터로 가서 메뉴판을 확인했다. 다양한 커피 메뉴와 '구좌 당근 3개가 들어간 100% 당근주스'가 눈에 띄었다. 쇼케이스에 진열된 마카롱과 당근 케이크도 맛있어 보였다. 팀장님은 당근주스를 주문하셨다. 나도 이곳에서는 당근주스를 시켜보고 싶었다.
제주는 지역마다 토질이 달라서, 마을마다 기를 수 있는 농작물이 다르다고 들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당근하면 구좌당근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다니는 나는 평소 구좌당근에 관심이 많아 구좌에 와서 당근을 꼭 사고 싶었는데, 생산자로 부터 소비자가 직거래로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친한 친구가 당근은 당근 마켓에서 사라고 했지만, 아직 당근 마켓에서 당근을 사려는 시도는 해보지 못했고, 제주에 진출한 대형마트를 통해 가끔 구좌당근을 사 먹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에 살면서 현지에서 사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임에도 대형마트를 통해 구매한다는 게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어쨌든 생산자로부터 직거래는 아니지만, 내가 워낙 당근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인지, 오늘 이렇게 구좌에서 직접 구좌당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다. 이런 카페가 많아지면 참 좋겠다.
카페 한가운데는 이곳이 리얼 구좌당근을 쓰는 카페라는 것을 인증하듯이 20kg짜리 구좌당근 박스를 잔뜩 쌓아서 제주 감성을 자극했다.
우리 케이크도 먹을래요?
카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정신없이 구경하는 내게 하니 팀장님이 물었다.
네, 좋아요.
'이 카페의 당근 케이크 맛은 어떨까?'
계피와 크림치즈, 당근을 모두 좋아하는 나는 새로운 곳의 당근 케이크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마카롱도 드실래요?
아 아뇨. 당근 케이크만 먹을게요.
평소 단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당근 케이크와 마카롱을 함께 먹으면 너무 달아서 힘들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며 팀장님은 말씀하셨다.
그럼 이따가 가실 때 가져가세요. 제가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렇게 우리는 주문하고, 바다가 보이는 정중앙의 테이블에 앉아서 8년간의 이야기를 했다. 팀장님은 아직도 왕성히 일을 하고 계신 중이라고 하셨고,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우리는 한때 같은 부장님과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사회초년생인 내게 멘토가 되어주셨던 소중한 분이었다. 나는 그분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사실 아직도 그분과 연락하고 지낸다. 그분은 계속 승진하셔서 지금 모 기업 대표님으로 일하고 있고, 팀장님은 아직도 그분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서로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장님이 일하시던 그때가 사람들 간의 관계도 돈독했고, 회사도 계속 성장하고 있던 때라서 즐거웠던 시절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추억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제주에 있고, 팀장님은 아직도 서울에서 일을 하고 계시니까 아마 우리가 지금이었다면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였을 거예요.
맞죠. 그래도 세상을 살다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는 거 같아요. 저는 과장님이랑 떨어져 있으면서 한 번도 우리가 연이 끊어졌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그건 저도 그래요. 오랜만에 만나도 팀장님은 어제 만났던 사람 같아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내가 팀장님께 제주에 산다고 언제 말씀드렸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런데도 나는 팀장님이 내가 제주에 있는 걸 알고 있으시다고 당연히 믿고 있었다. 서로가 이어져 있다고 믿는 느낌. 지금 생각하면 팀장님과 나는 참 신기한 사이이긴 한 것 같다.
과장님은 지금 어떤 일을 하세요?
아, 저는 글을 쓰고 있어요. 곧 책도 한 권 나오고요.
아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조용히 계시지만 뭔가 하고 계실줄 알았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진동벨이 울렸고, 우리는 주문한 음식을 받았다. 당근 주스 2잔과 당근 케이크가 바다를 배경으로 예쁘게 어울렸다.
예쁘다.
진짜 예뻐요.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다.
당근 주스 한번 먹어볼까요?
좋아요.
우리는 당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건 마치
리얼 100% 당근 맛이네요. 설탕이 하나도 안 들어 갔어요.
메뉴판에서 설명한 대로 당근 주스의 맛은 그냥 100% 당근 맛이었는데도 한 입 먹고 나니 늘 달콤한 음료 맛에 길든 내게는 카페에서 이런 맛의 음료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예상하지 못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 이런 맛 좋아해요.
저도 좋아해요.
이 당근 케이크도 먹어봐요, 우리.
팀장님의 말씀에 나는 당근 케이크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이 '카페 라라라'의 당근 케이크는 늘 보던 당근 케이크의 모양은 아니었고, 보통의 케이크보다 조금 더 납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케이크의 모양은 조금 달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당근 케이크의 맛이 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당근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갑자기 예상치 못한 놀라움이 밀려왔다. 이 당근 케이크의 맛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그런 흔한 케이크 맛이 아니었다. 당근 슬라이스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조금 더 쫄깃한 식감이 느껴졌고, 위에 토핑으로 올라가 있는 호두와 적당한 계피 맛이 어우러져 당근 케이크 특유의 톡 쏘는 계피의 느낌보다는 좀 더 편안하고 부드러운 맛이 느껴졌다. 입 안에서 톡톡 씹히는 호두의 느낌도 재밌었다.
뭐죠? 이 케이크?
나도 모르게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맛있는데요?
맛있죠? 맛있는데요?
'인간의 감각을 좀 더 섬세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는 걸까?' 이 새롭고 맛있는 케이크를 '맛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적 한계가 원망스러웠다. 당근을 워낙 좋아하는 나는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케이크의 반을 다 먹어버렸다.
'뭔가 맛있어.'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팀장님은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업무 전화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역시, 회사 일은 하나도 변한 게 없네.'
나는 팀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내가 일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울려대던 업무 전화와 잠시라도 긴장을 놓고 있으면 꼭 사고가 터지던 그때가.
아휴, 꼭 이렇다니까요. 오늘은 정말 걸림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꼭 이렇게 일이 생겨요.
꼭 그렇죠. 안 생기던 일도 생기고.
팀장님은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전화로 바쁜 시간을 좀 보내기도 하셨지만, 나는 그냥 그런 팀장님을 마주하는 것도 좋았다. 아직도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팀장님을 보니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고 활기차게 살고 있다는 그 느낌도 좋았고, 문득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서로 마주하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으시는 팀장님 뒤로 기계에서 나오는 비눗방울이 날아다녔고, 바다와 비눗방울과 팀장님이 좋았다. 나는 오늘의 평화로운 금요일 오후를 사진에 담았다. 팀장님과 나의 추억 한 장이 더 늘어나는 게 행복했다.
<찾아가기>
주소: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498-3
영업시간: 매일 10시~21시
바다를 보며 비눗방울을 맞을 수 있는 곳
카페 라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