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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희 Jan 15. 2024

23. 즐거웠던 크리스마스 파티


미자 언니네 동네에 도착하니 구름이 좀 심상치 않은 것 같다. 언니네 동네로 들어가기 전에는 분명 하늘이 이렇게 까맣지 않았었는데, 도착한 언니네 동네는 한라산에 눈구름이 걸려 마치 폭풍전야 같은 비장한 느낌이 든다. 일기예보는 분명 오늘 이곳에 눈이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같은 동네라도 고도에 따라 산간의 날씨가 달라지기 때문에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설마 뭐 눈은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는 예보가 있으니까 무슨 일이 나진 않겠지만... 나는 심상치 않은 동네 풍경에 일단 나중에 이곳을 빠져나가기 쉽게 차를 출구 가장 가까운 곳에 대고, 차의 방향을 평소와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확실히 이 동네는 춥네.' 


집에서 가장 두꺼운 옷을 챙겨왔는데도 미자 언니네 동네는 역시 춥다. 김 반장님 말씀에 의하면 겨울에 이 동네는 눈이 오면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또 아무나 나가지도 못한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가져온 짐을 챙겨 언니네 집 초인종을 눌렀다. 


"용희, 어서 와." 


문을 열어주며 미자 언니가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긴다. 


"용희, 드레스 코드 레드 잊지 않았지? 우리는 목도리 했어." 


"오. 귀엽네요." 


미자 언니의 말을 듣고 김 반장님을 보니 김 반장님도 귀엽게 빨간 목도리를 하신 게 보인다. 


"괜찮지? 얘들도 같이했다. 내가 손으로 뜬 거야." 


미자 언니네 집엔 통키와 퐁키라는 푸들 두 마리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반려견들도 빨간 목도리를 둘렀다.   

나는 평소 미자 언니의 손재주가 좋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목도리를 한 걸 보니 행복한 가정의 느낌이 물씬 들어 나까지 행복해지는 것 같다. 


"우리 와이프가 한 시간 만에 네 개를 다 뜨더라고. 손재주가 아주 좋아." 


츤데레 같은 반장님의 와이프 자랑이 이어진다. 


"아휴, 한 시간은 아니고 하루는 걸렸지." 


미자 언니도 김 반장님의 와이프 자랑이 싫지 않은 눈치다. 


"우리 크리스마스 파티하려고 난로도 샀어. 우리 집 너무 추울까 봐. 오늘은 보일러도 미리 땠다고. 웰컴 보일러야." 


"와 무려 웰컴 보일러요? 감사해요."


제주의 단독주택은 신기하게도 보일러를 하루 종일 때도 1도가 안 올라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단독주택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보일러를 끄고 전기장판이나 난로로 주로 생활한다고 들었다. 암튼 오늘 미자 언니는 우리가 추울까 봐 보일러도 미리 틀었다는 얘기였다.  


"음식 가져온 거는 여기에 세팅하면 돼." 


반장님의 말씀에 나는 주문해 온 치킨을 꺼냈다. 나를 보며 미자 언니가 말했다. 


"치킨 맛있겠다. 우리는 다른 집 메뉴랑 어울리는 음식을 고르느라 몇 번 메뉴를 바꿨지, 뭐야. 오늘 유진랑 도진씨가 목살 김치찜을 해온다고 해서 우린 마라샹궈에서 과메기로 바꿨어." 


"아, 그래서 급하게 메뉴를 바꾸신 거구나." 


하긴 여러 집에서 각자 메뉴를 하나씩 준비해 오니까 음식의 전체적인 조합을 생각하는 게 현명한 듯하다. 


"전에 강원도에서 과메기 몇 번 시켜 먹어봤었는데, 오늘 이 집이 제일 맛있더라고. 한번 먹어보면 맛에 반할 거야." 


"이따 한 번 먹어볼게요. 저 처음 먹어봐요." 


"아마 맛있을 거야." 


우리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유진 씨와 도진 씨, 그리고 혜수 언니가 도착했다. 드레스코드가 레드라는 말에 산타 모자를 사면서 나만 너무 티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유진 씨와 도진 씨의 크리스마스 커플룩과 혜수 언니의 화려한 의상을 보자마자 내가 산타 모자를 산 게 참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분위기라면 어쩌면 내가 산타 망토까지 샀어도 괜찮을 뻔했다. 


"언니, 이거 김 반장님이랑 하나씩 하세요. 선물이에요." 


패셔니스타 혜수 언니는 가방에서 산타 인형 세 개를 꺼내면서 미자 언니에게 화려한 크리스마스 모자 머리띠를 내밀었다. 


"오, 고마워." 


"이 산타들은 오늘의 아르바이트생." 


혜수 언니가 산타 인형을 꺼내면서 인형의 등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 산타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산타 인형이 노래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오니 파티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는 듯하다. 


"그럼 우리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단체 사진부터 찍을까?"


"좋아요." 


김 반장님의 제안에 우리는 각자의 선물을 세팅하고 산타 인형 앞에 앉아서 포즈를 취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복장을 하고 다 같이 모여 앉으니, 서로의 온기가 느껴져 넘 포근하고 좋다. 어떻게 우리가 올해 만나게 된 걸까?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여있는 것도 신기하고, 파티를 하는 것도 신기하고, 그냥 모든 게 다 신기한 순간이다. 


왁자지껄한 기념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유진 씨와 도진 씨는 정성이 가득 담긴 목살 김치찜을 가져왔는데, 이걸 끓이고 어떻게 모양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게 가져온 건지 그 정성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유진 씨 말로는 요리 잘하는 도진 씨가 며칠 전부터 고심하면서 준비한 요리라고 했다. 


"맛이 있으셔야 할 텐데..." 


포장을 뜯으며 도진 씨가 말했다. 요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모두 앞에 내놓는 도진 씨의 긴장되는 마음이 내게도 느껴지는 듯하다. 


"아휴, 이걸 어떻게 준비했어? 모양도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네? 진짜 했다." 


도진 씨의 마음을 읽었는지 미자 언니가 말했다.  


"우린 다 사 왔는 데, 직접 이렇게 끓어오다니 넘 대단해요." 


혜수 언니도 도진 씨에게 한 마디 하며 말했다. 


"저는 회로 가져왔어요. 초밥은 여기 밥 있으니까 드시고 싶으신 분들은 만들어 드시면 되요." 


그렇게 한 상이 차려지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도진 씨가 준비한 김치찜은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고, 난생처음 먹어보는 과메기는 쥐포는 아닌 데 쥐포같은 쥐포 아닌 맛이 났다. 김 반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집 과메기는 비린내가 전혀 없이 맛이 좋다고 했다. 혜수 언니가 사 온 회는 신선했고, 내가 사 온 단골 치킨집 치킨은 사장님 손 맛 덕분에 인기가 좋았다. 그렇게 한 참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 반장님이 말씀하셨다. 


"자, 그러면 이제 마니또 선물 증정식을 할까? 선물 증정은 어떻게 하는 거야?" 


"일단 선물 증정을 할 때는요. 자기의 마니또는 누구였고, 왜 이 선물을 샀는지 말씀하시면서 주시면 되요." 


반장님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그런 것도 해야 해?" 


"당연하죠." 


츤데레 김 반장님은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또 무슨 말을 하며 마니또 선물을 주실 지 고민하는 눈치다. 


"그러면 누구부터 해?" 


"그럼 오늘 김치찜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도진 씨부터 하기로 해요." 


그 말을 듣고 도진 씨는 선물을 가져와서 미자 언니에게 주었다. 포장 안에는 휴대용 충전식 보조배터리 겸 손난로가 들어 있었다. 모양은 오리 모양이었는데, 특이하고 귀여웠다. 


"여성분들 선물은 어떤 걸 줘야 할지 몰라서요. 고민 많이 했는데...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너무 귀여운데? 나 진짜 맘에 든다." 


"언니, 그 카드는 언니 생각하면서 제가 대신 쓴 거예요." 


크리스마스카드를 읽는 미자 언니를 보며 유진 씨가 말했다. 


"고마워. 손난로 잘 쓸게." 


"그럼 이제 누구 차례야?" 


다음 차례가 궁금하신 김 반장님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미자 언니가 받으셨으니, 이제 언니가 마니또에게 선물 주시면 돼요." 


"아, 그래? 내 마니또는 혜수야." 


미자 언니는 혜수 언니에게 선물과 카드를 주면서 말했다.  


"혜수가 요즘 공부를 한다고 해서 샤프를 샀어. 여기 이름도 새겼어." 


상자 안에는 레몬 색 예쁜 샤프가 들어 있었다. 


"카드도 썼는데... 여기 있어." 


"오, 언니 고마워요." 


혜수 언니는 미자 언니의 선물과 카드를 받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숨죽여 혜수 언니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카드를 읽어 내려가던 혜수 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언니를 바라보던 우리는 살짝 당황했다. 늘 당당한 패셔니스타 혜수 언니가 눈물을 보이며 마니또 선물에 감동하다니... 늘 당당한 혜수 언니는 사실 작은 것에도 감동하는 여린 마음을 가진 걸까? 


다음으로 혜수 언니의 마니또는 김 반장님이었는데 언니는 김 반장님께 하얀 골프장갑을 선물했다.


"골프 많이 치시니까 좋은 장갑 끼고 잘 치시라고 준비했어요. 카드는 생략이요." 


장갑을 한 번 껴보신 반장님은 장갑이 맘에 드시는 듯 혜수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내 마니또는 용희 씨야." 


어쩐지 지난번 마니또 뽑기 하실 때 내 얼굴을 슬쩍슬쩍 보시더라니 내가 마니또였던 거야? 아니, 그럼 김 반장님의 핸드폰 케이스 뒤에 계속 들어가 있던 이름이 내 이름이었던 건가... 나도 모르게 살짝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반장님께 핑크색 산타 포장지로 포장된 납작하고 작은 상자를 받았다. 선물을 받고 조심조심 뜯는 내게 반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냥 터프하게 팍팍 뜯어봐. 선물은 팍팍 뜯어야 제맛이지." 


반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힘차게 포장지를 뜯었다. 포장지 속에는 초록색 작은 수첩이 들어있었다.  


"용희 씨는 작가니까 인터뷰 갈때 들고 가라고 가벼운 수첩으로 샀어. 그래도 이거 비싼 거야." 


초록 가죽으로 된 작은 수첩의 표지에는 은색으로 내 닉네임도 새겨져 있었다. 


"이름을 새겨준다고 하길래 고민해 봤는 데... 용희 보다는 용희 씨가 지금 쓰는 닉네임이 더 예쁠 것 같아서..." 


"오... 어떻게..." 


수첩에 내가 쓰는 닉네임을 새겨주시고 멋쩍게 말씀하시는 김 반장님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까 혜수 언니가 마니또 선물을 받고 우는 걸 보고, 패셔니스타 혜수 언니가 웬일이지 했었는데, 내가 막상 같은 입장이 되니 혜수 언니가 왜 울었는지 그 마음이 백번 천번 이해가 됐다. 나는 옆에 있던 유진 씨를 보면서 말했다. 


"아, 이래서 아까 혜수 언니가 운 거구나. 막상 제가 받으니, 언니가 왜 울었는지 너무 알 것 같아요."


 "언니, 초록색도 언니 이미지랑 잘 어울려요. 색깔도 넘 예쁘다." 


유진 씨의 말에 그만 눈물이 마구 쏟아져 버렸다. 


"감사합니다." 


나는 김 반장님의 눈을 보면서 어렵게 한마디 했다. 마니또 선물 증정이 원래 이렇게 감동적인 거였나?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는 내 평생 못 잊을 것만 같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유진 씨를 보며 미리 준비한 핸드크림과 책 선물을 주었다. 


"언니, 선물이 두 개예요." 


선물을 받고 크리스마스카드를 펼치며 유진 씨가 말했다. 


"언니..." 


카드 가득 쓰인 내 손 편지에 유진 씨가 감동한 것 같다. 유진 씨가 카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미자 언니가 그 카드를 받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쌤, 쌤은 저만큼 쓰시는 데 30초 컷 아니에요?" 


도진 씨가 나를 보고 한마디 했다. 


"우리 마니또 선물 증정 넘 훈훈한 것 같아요." 


혜수 언니가 말했다. 


"아니, 이게 이렇게 감동적일 일이야?" 


마니또 게임은 싫다던 김 반장님도 한마디 하셨다.  


"그럼, 우리 내년에도 만날까요?" 


나의 제안에 사람들이 대답했다. 


"좋아 좋아." 


마니또 선물에 감동한 우리는 말 나온 김에 내년 파티 날짜도 정해버렸다. 우리는 내년 12월 셋째 주 토요일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이렇게 매년 풍성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르지만... 혹시 우리 중 누군가 멀리 떨어지더라도 이날은 꼭 모이기로 해요. 미국에 있어도 오기로요."


내 말에 행동 빠른 미자 언니는 이참에 내년 마니또도 뽑아두자면서 메모지와 볼펜을 준비해 왔다. 그렇게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내년 마니또를 뽑았다. 


"나는 내 마니또가 맘에 든다." 


"나도 나도."


각자 누구를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자신의 마니또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다들 일 년 동안 마니또가 누구인지는 아무에게도 말해주기 없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이번에도 김 반장님이 가장 적극적이다. 


"난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핸드폰 케이스 뒤에 마니또 이름을 넣어둘 거야. 그럼 내 마니또는 일 년 동안 또 내 핸드폰 케이스 뒤에 있겠네?" 


마니또 게임이 어색해서 싫다던 김 반장님은 어느새 내년 마니또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듯했다.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니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스쳐 가고 있었다.  


"아, 그러면 이제 연말이니까 기왕 펜이랑 메모지도 있는 김에 새해 다짐 한 번씩 써볼까요?" 


"그건 또 뭔데?" 


이번에도 제일 먼저 김 반장님이 물어보셨다. 


"종이에 자신의 새해 다짐을 적고요. 봉투에 담아서 봉해 놓았다가 내년 크리스마스 파티할 때 일 년 동안 얼마나 계획을 이뤘는지 확인해 보는 거예요." 


"새해 다짐? 몇 개나 적는 건데?"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그랬죠. 일 년 후 종이를 꺼냈을 때 당신은 왜 더 많이 적지 않았는지 후회할 것이다. 모든 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당신이 그 일을 종이에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야?" 


"믿거나 말거나. 밑져야 본전이니까 다들 적으세요." 


뭔가 확신에 찬 나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함께 새해 다짐을 적었다. 우리는 한참을 고심해서 정성스럽게 각자의 새해 다짐을 적은 뒤 미자 언니가 가져온 큰 봉투에 모두의 소망을 담았다. 


"용희,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미자 언니가 내게 물었다. 


"일 년동안, 이 봉투를 봉해 놓았다가 내년에 함께 열어보면 돼요." 


"좀 신기하다. 진짜 우리 소원이 이뤄질까요?" 


혜수 언니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분명 다 이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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