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6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끝내며 엄마는 떠났다. 모두가 출근한 아침, 홀로 몇 번의 짐을 옮겨 나르는 것으로 가정을 엄마 인생에서 분리시켰다. 오후에 엄마로부터 짐을 꾸려 나왔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허망함과 함께 슬픈 안도감을 느꼈다.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고 마음 저편으로 짐작하던 일이 갑작스레 다가온 것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다행스러웠다. 좋은 방법이라고, 엄마라면 잘 살 거라고. 그로부터 며칠 뒤 가정법원으로부터 이혼 서류가 집으로 도착했고 아빠는 분노했다.
아빠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이 술주정으로 물건을 부수고 있는 것이란 걸 정작 아빠는 모를 거다. 달에 서너 번은 그런 상태로 난동을 부렸던 아빠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반면 풀 같은 성격의 엄마는 언제나 그을리고 마음에 화를 입었다. 이 힘든 생활을 그래도 20년 넘게 인내하며 견딜 수 있었던 건, 완숙하지 않은 채 남겨질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자주 화마로 변하는 아빠로부터 지켜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두 아들은 훌쩍 커서 성인이 되었고, 미숙하지만 앞가림을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극단적인 이혼방법을 선택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작품이다. 둘째이자 막내아들인 나는 어른 말을 잘 듣고 형을 잘 따르며 성격이 섬세한, 엄마가 자주 표현하던 딸 같은 아들이었다. 자신을 닮아 여자 같은 손재주를 지녔다며, 엄마는 자신의 성격까지 쏙 빼다 닮은 내가 딸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표현을 했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넘어 같은 여자로서의 공감을 바라면서. 신기하게도 내가 닮은 건 외모와 성향만이 아니었다. 서로 공유한 적 없던 미술적 취향도 완벽히 동일했다. 이런 나를 통해 보통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들과의 은근한 비교로 엄마의 작품을 자랑하곤 했다. 그럴 때면 집에서 기를 못 펴는 엄마가 밖에서는 당당해지는 모습에 다행이라고 느꼈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엄마의 작품은 오랜 시간 방황했었다. 하지만 이내 좋은 공동체를 만나서, 좋은 책들과 사람들을 알게 되어 올곧은 방향으로 성장했다. 그 핵심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인내심과 의연함이다. 거기에 나는 농담을 더했다. 농담은 고통을 절감시키고 사람과 상황을 유화시킨다. 그 방황은 필요한 과정이었고 내게 이로운 고통이었다. 엄마가 평생 지고 살았던 아빠에게 이제 나는 지지 않는다. 아빠를 다루는 방법은 산처럼 의연하게 인내하는 것도, 맞불처럼 서로의 감정을 태우는 것도 아니었다. 불같은 성격은 강처럼 유한 성격으로 맞서야 했다. 엄마가 완성시키고 싶던 아들은 엄마의 손을 떠나고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야생화는 모나지 않은 존재감으로 주변 환경과 잘 동화된다. 풍파를 견뎌내면서도 굳건히 자라는 게 어찌 보면 엄마와 나의 삶과 닮았다. 아빠의 위협으로부터 대신 상처 입고, 자식에게 까지 번질 고통을 줄이려고 스스로 몸을 던져 막았던 엄마의 희생 덕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속에서 나를 키워낸 것으로 엄마의 소명은 충분했다. 그 후에 건강한 정신을 담아내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엄마는 엄마로서 부족한 점 없었고
나는 변함없는 엄마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