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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항준 Danniel Park Apr 27. 2021

대중주도시대! 대중(Crowd)의 정명

대량 생산·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을 ‘대중(大衆)’이라 한다. 모 포탈사이트의 사전(事典)에는 “엘리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수동적, 감정적, 비합리적인 특성을 갖는 다수의 무리”라 정의되고 있다.           


[포탈사이트에 정의된 ‘대중(大衆)’의 사전적 정의]

         

사전에서는 ‘대중(大衆)’의 상대적 개념을 ‘엘리트(지배계층)’로 보고 있다. 즉, 정보 권력을 장악한 ‘엘리트 집단’에 반해 ‘비합리적이고, 수동적이며, 감정적인 특성’을 가진 피지배 집단으로 ‘대중(大衆)’을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정보비대칭성을 기준으로 ‘대중(大衆)’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엘리트’란 사회의 발전과 운영에 있어 매우 합리적이고, 능동적이며, 이성적인 특성을 가진 집단이며 따라서 엘리트의 사회 발전의식과 운영방식에 있어 ‘대중(大衆)’은 수동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결국 ‘대중(大衆)’은 ‘보호의 대상’이 되고, ‘교화의 대상’이 되며, ‘나눔의 대상’이 된다.       

 

근대들어 이에 대한 반발로 ‘대중(大衆)’은 자신들에게 ‘생각의 자유’, ‘기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달라고 외쳐왔다. ‘자유(自由)’를 얻기 위한 목숨을 내 놓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 엘리트가 되기 위한 노력에 인생을 바치기도 한다. 정보 권력과의 전쟁에 힘이 부치면 음악이나 미술, 문학운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21세기 들어 ‘대중(大衆)’이 미개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이유가 명확해졌다. 바로 ‘정보비대칭’ 때문이다. 정보접근성에 취약한 ‘대중(大衆)’은 적은 양의 정보만으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풍부한 정보를 가진 엘리트들의 눈에는 비합리적이며, 수동적이고, 감정적인 의사결정 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선거 후보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니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정당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모르니 지역감정대로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을 생각 없는 ‘레밍(쥐)’으로 폄하하는 망언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엘리트를 원망하지는 말자. ‘정보비대칭성’은 정보 공유와 실시간 통신이 불가능했던 물리적 환경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다. 오히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지난 2천 년간 엘리트들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안전을 되찾고 인류사회를 발전시켰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나 맹자의 왕도정치는 정보비대칭의 물리적 한계 내에서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대칭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대중(大衆)’의 정의는 달라져야 한다. 통신·네트워크의 발전으로 정보카르텔이 해제되고, ‘정보동등’의 시대다. ‘정보동등(정보대칭)’은 ‘엘리트’와 ‘대중(大衆)’의 물리적 거리가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大衆)’에게도 능동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발전시킬 능력과 기회가 온 것이다.   

   

대중주도사회에서의 ‘대중(大衆)’이란 ‘정보대칭적 환경 하에 참여, 공유, 개방의 자유를 주도하는 능동적인 주체’라고 정명(正名)할 수 있다. 통신·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공유가 용이해진 ‘대중(大衆)’은 합리적이며, 주도적이고, 이성적인 집단으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온라인 국민청원, 촛불·태극기부대 활동, 최근 성숙한 시민의식이나 선거의 결과들을 보라. 이미 ‘대중(大衆)’은 똑똑해지고, 주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참여, 공유, 개방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대중주도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숙명이며, 사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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