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은 ‘이음(Protocol)’의 학문이다. 같은 개념이라도 시장에서는 브랜드 가치, 수학에서는 루트(√), 경영에서는 핵심역량, 물리학에서는 E=mc²나 F=ma, 동양철학에서는 理처럼 서로 다른 기호로 표현된다. 기호학은 이처럼 이질적인 시각과 언어, 환경 속에서 정의된 가치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다리이자, 단순한 번역을 넘어 새로운 관점을 창출하는 창조의 기제다.
역사 속에서 기호 하나가 문명의 비약을 이끈 사례는 많다. ‘0’이 수학에 도입되자 인류의 사고 체계와 문명 구조는 완전히 새 국면을 맞았다. 복잡하게 설명해야 했던 개념들이 간결해졌고, 불가능해 보이던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기호는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사고와 지식의 압축 장치이자, 새로운 질서를 여는 열쇠다.
오늘날 AI 시대에 수학과 물리학, 철학과 데이터 과학이 만나면 각자의 기호 체계가 종종 충돌한다. 기호학은 이 다른 언어와 코드를 잇는 ‘중간 프로토콜’로서 학문 간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한다. 디지털과 미술, 생명공학과 전자공학의 융합처럼 분야 간 만남이 이루어질 때, 그 첫걸음에는 반드시 기호학이 있다. 연결될 학문 간의 ‘이음 규칙’을 세워주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루트(√)는 수학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도형의 계산에 쓰인다. 그러나 그 원리를 이해한다면, 양자의 세계에서 무(無)에서 유(有)가 생기거나, 기체에서 물질이 형성되는 원리와도 맞닿는다. 동양철학의 理氣論(이기론)에서도 루트는 보이지 않는 理가 사물에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경영·경제학에서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잠재 역량을 발굴하고 측정하는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심리학에서는 자기다움을 찾아 애기애타(愛己愛他)를 실천하는 도구가 된다.
다만 기호학은 그 범위가 광범위한 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언어학을 넘어 수학, 과학, 암호학, 미학, 심리학까지 포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효섭 교수의 『인문학, 기호학을 말하다』를 통해 기호학의 체계와 철학자, 언어학자, 기호학자들이 연구한 매커니즘과 아키텍처, 알고리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오한 기호학이라는 거대한 관문 앞에서는 비록 입문자용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언어와 기호의 탄생과 역학 관계, 상호 작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책이었다.
AI는 언어와 숫자를 모두 다룰 수 있지만, 그것을 인간이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기호학에서 비롯된다. 기호학이 있어야 학문 간 융합이 가능하고, 그 융합이 혁신으로 이어진다. AI와 인간을 이어주는 이음의 프로토콜이 곧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1세기 AI 시대의 기호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미래 문명의 기반으로 다시 주목받아야 한다.
박항준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누림경제발전연구원장
펫누림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디케이닥터 대표이사
기술거래사/기업기술가치평가사
공)저서. 더마켓TheMarket / 스타트업 패러독스 / 크립토경제의 미래
좌충우돌 청년창업 / 블록체인 디파이혁명 / CEO의 인생서재
/ 이노비즈 CEO독서클럽 선정도서 21選 (사회관 편) (세계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