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정부가 엔트로픽을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지정하면서 미국 국방부의 AI 기반 군사정보 플랫폼인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엔트로픽의 클로드 코드를 사용하는 디지털트윈 기업 팔란티어가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반면 미국 정부가 대신 챗GPT를 운영하는 오픈AI를 선택하면서 AI 기술이 살상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AI 윤리 논쟁이 격화되었고, 일부 GPT 사용자들이 서비스를 탈퇴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 논쟁의 핵심 문제의식은 이미 『기술공화국 선언(The Technological Republic)』을 공동 집필한 알렉스 카프와 니콜라스 자미스카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흔히 빅테크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는 미래를 상상하면 차가운 알고리즘의 통치체제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기술공화국의 비전은 단순한 기술 지배 체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독일 사회철학의 비판적 전통과 역사가 어떻게 국가의 흥망을 만들어 왔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은 기술을 예찬하는 선언이 아니라, 기술 앞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에 가깝다.
독일 사회철학 박사 출신인 알렉스 카프는 기술을 단순한 효율성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 그는 기술이 언제나 권력 구조를 재편해 왔으며, 인간의 자유를 확장할 수도 억압할 수도 있는 실존적 조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설계한 팔란티어의 온톨로지 시스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파편화된 데이터를 단순히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의미 구조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도구적 이성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철학적 결단에 가깝다.
니콜라스 자미스카는 정통 학계의 역사학자라기보다는, 역사학적 훈련을 바탕으로 문명의 흥망과 제도의 실패를 추적해 온 저널리스트이자 사상가에 가깝다. 그는 제국과 국가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통의 패턴, 즉 변화의 신호를 인식하고도 결단하지 못한 사회의 취약성을 강조해 왔다. 『기술공화국 선언』에서 그가 기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기술 낙관주의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몰락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 지식인들의 태도와도 닮아 있다. 당시 일본은 존왕양이라는 근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이는 전통을 포기한 선택이 아니라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실리적 판단이었다. 카프와 자미스카가 기술이라는 합리주의의 정점을 수용하는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이는 인문학적 신념을 저버린 변절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술이라는 가장 날카로운 도구를 스스로 쥐겠다는 선택이다.
또한 카프는 그의 스승들이 경계했던 지점과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기술을 지배와 도구적 이성의 확장으로 비판했다면, 카프는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회피한 결과를 더 위험한 선택으로 본다. 그는 기술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판단하며, 오히려 기술을 책임 있게 설계하고 통제하지 않을 때 자유민주주의가 더 빠르게 잠식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카프는 비판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결론에서는 분명히 다른 길을 선택한다.
결국 『기술공화국 선언』은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통해 고전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지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과거에는 서구 문물을 배워 국력을 키워야 했다면, 오늘날 그 과제는 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은 객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주인으로 설 것인가. 카프와 자미스카는 그 질문 앞에서 회피가 아닌 결단을 선택한다.
최근 이 책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정치·경제·군사 영역까지 깊이 침투한 오늘날, 기술을 단순한 시장 도구로만 바라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트윈과 데이터 플랫폼은 이미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기술을 설계하는 방식이 곧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따라서 기술공화국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을 통제하지 못한 사회가 결국 기술에 의해 통제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경고에 가깝다.
오늘날 데이터와 인공지능은 새로운 권력이다. 문제는 그 권력을 누가 설계하고,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이다. 『기술공화국 선언』은 그 질문 앞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기술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술을 설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