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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Nov 14. 2023

아껴쓰자 아킬레스

   몇 달 전부터 검도를 마치고 나면 왼발 뒤꿈치가 욱신거렸다. 검도는 왼 뒤꿈치를 가볍게 든 채 밀면서 걷거나 도약해야 하기에 운동 끝나고 나면 가끔 아팠었다.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이 들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트레칭하고 조금 쉬면 좋아졌는데 그렇게 내버려 둔 게 오산이었다. 며칠 쉬고 괜찮아서 다시 운동을 한 날, 칼로 벤 듯한 아픔에 쩔뚝 걸음을 해야 했다.

   검도관에 전화할까 말까 망설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달쯤 쉬어야 될 것 같습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관장님의 안타까움과 위로 섞인 당부에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욱신거리는 뒤꿈치를 노려본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쉴 수밖에. 

   참을 수 없는 통증에 한동안 테니스엘보우로 신세 졌던 정형외과에 들렀다. 정형외과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 계단이라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고 하셨다. 

   “이제 몸 좀 아껴서 쓰세요, 나이 생각도 하시고…” 

   웃으면서 툭 던지는 말씀에 기가 푹 죽었다. 

   ‘아킬레스건염’이었다. 종아리 두 개의 큰 근육 힘줄이 하나의 힘줄(tendon)로 모여 발꿈치뼈에 붙은 것이 아킬레스(Achilles)건이며 그곳 염증 때문에 그렇게 아팠던 것이었다. 내 아킬레스건은 내 부주의와 무신경으로 일상생활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다. 

   신화에 따르면 아킬레스는 그리스 북부 테살리아 지방 퓌티아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다. 숱한 남신들이 아름다운 테티스에게 구혼했지만, 테티스는 끈질긴 구애를 펼친 펠레우스를 선택했다. 그들의 결혼식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제외한 여러 신이 초대되었다. 초대되지 못했단 사실을 알게 된 에리스는 결혼식에 와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새겨진 황금사과, 소위 ‘파리스의 사과’를 던져 놓았다.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그 유명한 사과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스의 발목을 잡고 저승의 스틱스강에 아들의 몸을 담가 어떤 상처도 입지 않는 무적의 몸으로 만들었다. 아킬레스를 강물에 담그기 위해 잡았던 발목 부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후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가 쏜 화살에 뒤꿈치를 맞고 죽었으며 치명적인 약점을 얘기할 때 쓰이는 ‘아킬레스건’의 유래가 되었다. 

   물리치료와 충격파 치료를 받았다. 아킬레스건을 때리는 충격파의 날 선 아픔. 눈물과 비명을 참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힘껏 막았다. 하지만 찔끔 삐져나온 눈물과 속에서부터 올라온 ‘악’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바다의 여신이 살짝 원망스러웠다. 아킬레스의 두 발목을 번갈아 잡아가며 스틱스강에 담갔다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텐데. 에리스 여신을 초대했더라면 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아킬레스도 잘못되진 않았을 텐데. 쓸데없는 공상에 뒤척거리다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 다리에 살짝 힘주며 걸었다. 다행히도 전날만큼 아프지는 않아 9층에 멈춰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조심스레 한 계단씩 올랐다. 진료실 입구 계단 앞에 젊은 아이 엄마가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3층으로 가는 계단을 보고 있길래 나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노란 바지에 더 샛노란 상의 입은 병아리 같은 아이가 계단을 네 발로 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더 오르려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멈춰 섰다. 나의 멈춤과 동시에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뒤돌아보았다. 엄마와 눈이라도 마주쳤는지 아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나를 보고 웃은 건 아니었지만 그 웃음 하나에 하루가 환하게 열리는 기분이었다. 빛나는 아이의 웃음에 혼자 가벼운 눈인사로 답하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찌릿한 통증에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왼발을 보는 순간 아픈 발 위로 계단을 힘껏 밀며 올라서던 아이의 귀엽고도 튼실한 발이 겹쳐 보였다. 아마도 아이의 작은 아킬레스건은 계단을 신나게 오르는 자식을 말없이 지켜보던 엄마의 포근한 사랑이 한껏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두 손 두 발로 계단 오르던 아이가 두 다리로 걷게 되고 학교에 가고 또 사회에 나서더라도 언제까지나 엄마의 따듯한 그 눈길이 항상 함께하기를…. 

   그나저나 나의 아픈 이 아킬레스는 나이 들어 주름진 어머니께 말씀드릴 수도 없으니 점심 먹고 서둘러 물리치료 받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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