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위로와 위로가 오가는 곳 , 진료실
잿빛 하늘 너머로 장맛비가 내렸다. 이런 날이면 의료계의 오랜 징크스 ‘유비무환(有備無患)’이 떠오른다. 비가 오면(有비) 환자가 없다(無환)는 우스갯소리다. 한가로운 창가에 서서 서늘한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두 아이가 생각났다.
한 아이는 마산에서 온, 태어날 때부터 심한 뇌 손상을 안고 있던 세 살배기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눈이 돌아가며 멍해지는 모양의 경련이 있었다. 뇌 손상 때문에 신체마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엄마가 항상 안고 다녔다. 뇌파검사 결과 ‘영아 연축’으로 진단받았다. 치료가 힘들 뿐 아니라 인지 발달마저 퇴보할 수 있는 예후가 아주 좋지 않은 뇌전증이었다. 약물치료에도 좋아지지 않아 ‘케톤생성 식이요법’이라는 특수한 치료를 시작했다. 금식하면 몸에서 케톤이란 것이 만들어지고 케톤이 발작을 억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금식시켰다간 탈수며 신부전으로 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므로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운 격이 될 수 있다. 다행히 1995년에 금식 없이 케톤을 생성시켜 발작을 조절할 수 있는 식이요법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케톤생성 식이요법은 열량의 80%를 지방(fat)으로 공급해 인위적으로 케톤이 만들어지게 하여 발작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절대 쉽지 않지만, 효과적인 치료법이다.
몸이 뒤틀린 아이를 안은 채 눈물짓던 아이 엄마의 말에 나도 같이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아이는 한 달 만에 발작이 멎고 뇌파도 좋아졌다. “많이 좋아졌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쯤 초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지낼까.보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덜컥 걱정이 앞선다. 발작은 조절되었어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아이. 그 곁을 지키는 엄마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할까. 뉴스에서 봤던 일본의 간병 살인이 떠올랐다. 불가피하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되는 아이들이 한 해에 수천 명 이상이다. 예전보단 좋아지긴 했지만,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부모나 보호자가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때론 빛나는 희망을 만나기도 한다. 지난 추석 무렵 찾아왔던 그 청년처럼.
진해에서 오랫동안 치료 받았던 아이, 아니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부모님과 함께 꽃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대학생이 된 녀석은 현역 2급 판정받아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재발 가능성을 언급하며 훈련 시 배려를 부탁하는 소견서를 써주었다. 뇌전증을 이겨내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씩씩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마음 한편의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훈련 잘 받고, 잠 못 자면 큰일 나니 부대장한테 꼭 얘기해야 한다.”
다 큰 녀석이 해맑게 웃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책꽂이에서 미처 다 읽지 못한 백석 시집을 꺼내 건넸다.
“힘들거나 지칠 때 읽어 봐.”
어려운 치료를 잘 견뎌내고 ‘완치’ 판정받은 청년. 그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청년의 앞날이 빛나길.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대비하여 건강한 사회의 성원으로 자리 잡길. 마음 깊이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