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_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일이 되길
진료창에 ‘티무르’라는 낯선 이름이 떴다. 어디서 온 아이일지 내심 궁금해졌다. 잠시 후 갈색 멜빵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다섯 살 남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쫄래쫄래 걸어와 진료 의자에 앉았다. 아이 엄마는 익숙하게 스마트폰 번역 앱을 내밀었다. ‘어제부터 고열에 입안이 아파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라는 문장이 떠 있었다.
“where are you from?” 나의 질문에 “카자흐스탄”이라고 답했다. 그러냐고 내가 고개 끄덕이는 순간, 그녀가 서툰 한국말로 덧붙였다. “고려인, 이에요." “아, 카레이스키?” 나의 물음에 아이 엄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레이스키’를 아느냐며 되물었다.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 러시아어로 ‘고려의, 한민족의’를 뜻하는 형용사로, 우리 민족의 길고 고단했던 유랑의 역사를 품고 있다. 19세기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을 고려인이라 했고 또 ‘카레이스키’라고 불렀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고, 러시아는 조약을 중재했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얻게 되었으며,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를 묵인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뒤 연해주로 향하는 조선인의 물결은 더 거세졌고, 그곳은 곧 독립운동의 뜨거운 중심지가 되었다. 조국을 떠나왔지만, 조국을 잊지 않았던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군에 입대하며 새로운 땅의 시민이 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1937년 8월, 스탈린의 잔혹한 명령 하나로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의심 하나로, 수십만 명의 고려인이 하루아침에, 화물열차에 실려 낯선 땅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며 비극은 반복되었다. 독립한 공화국들에서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자,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또다시 정처 없이 연해주나 우크라이나 등지로 흩어져야만 했다.
‘고려인’ 또는 ‘카레이스키’라는 이름에는 이처럼,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 겪어야 했던 수탈과 이주, 정착과 추방, 그리고 또다시 유랑해야만 했던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1900년대 초, 북쪽에서 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연해주로 가셨다고 들었어요.”
카자흐스탄에서 외국계 회사에 다녔다는 티무르의 엄마는 유창한 영어로 집안의 내력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100여 년 전 할아버지의 선택이, 세대를 건너 손녀를 카자흐스탄으로, 또다시 이곳 남도의 작은 도시로 이끌었다. 그녀의 고단했을 삶과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하니, 한 개인의 삶이란 거대한 역사의 파도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말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 앞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의 말처럼, 진료실 문을 나서는 티무르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응원했다. ‘고려인’, ‘카레이스키’라는 아픈 역사의 이름표를 넘어, 어린 티무르가 때때로 힘든 순간을 마주하더라도 ‘세계시민’으로 꿋꿋이 성장하기를. 그리하여 그들 앞에, 상상 이상의 미래가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