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열차 데이트 칸

나만의 지하철 (6)

by 새초록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것 같은 날이면 나만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떠올려요.

그 상상의 지하철에 올라타서 들꽃 언덕과 무해한 아침의 칸과 스펀지케이크 같은 나의 방에서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꼭 갖고 싶었던 시간을 보낸 후에...







마법 열차 데이트 칸







이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음 칸으로 이동해요.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대 앞에서 한참을 공들인 후에요.

‘데이트’라는, 오래 잊고 있었던 말을 떠올리면서요.





여기서부터는 누구 엄마, 아빠라는 역할 대신 불리고 싶은 이름을 고르기로 해요.

마치 《빨강 머리 앤》의 앤처럼 정작 나는 마음속으로 우아한 코델리아든 끝에 e가 붙은 낭만적이고 여운 있는 Anne이든 한 번도 버리지 못했으면서도, 반대로 다른 마음속에 간직된 이름표들에는 눈을 감은 척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남편 말고 남자로 와요.

나도 오늘은 아내 아닌 여자로 갈게요.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아내라는 말이 좋아요.

초록 지붕 집으로 이어진 그 사과나무 꽃길과 숲과 호수에 압도되어 자기를 자연의 신부로 생각한 앤처럼, 나는 우리 가정의 모든 아름다움과 침실의 온기와 자상한 말투가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아서 아내라는 말이 참 좋아요.


현실에서 우리 집에는 초록 지붕이 없어요.

네모난 상자 같은 데서 쳇바퀴를 돌려요.

아름답지 않은 많은 것에 둘러싸여 덜컹덜컹 억지로 억지로 밀리는 듯 끌리는 듯 굴러가는 네모난 바퀴 같아요.

대안 없는 상상으로 삶의 고단함을 어디까지 덜어낼 수 있을까, 사실은 나도 장담할 수 없고 두려워요.


하지만 이 세상에 기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가지 않는 집이 있을까요?

인생의 절반쯤 살아보니, 그 손님은 아무 때나 오기 마련이더군요.

방문 시기도 알 수 없지만, 정말 좋은 손님이었는지 나쁜 손님이었는지는 한참 후에나 밝혀지더군요.

어쩌면 생의 끄트머리에서나 알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때까지 우리는 흘러가기를 포기하지 말아요.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었어요.

항상 불행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인생이라는 요리에서 완벽한 정량의 레시피를 미리 알 수만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요리가 탄생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상대의 레시피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의 헤드 셰프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엉망진창 요리 가운데서 우연처럼 얻어진 듯 보여도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탄생한 둥근 매운맛과 달콤한 쓴맛과 포근한 신맛을 기억해요.


우리는 아직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요리학교의 학생들이었죠.

배워야 할 요리들은 살아야 할 날들처럼, 비슷해 보여도 살짝살짝 달라서 하루하루 새로운 감각이 있어야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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