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지하철 (5)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어두운 동굴 속에 있는 것만 같을 때 나는 나만 탈 수 있는 상상의 지하철을 타요.
그 지하철 한 칸 스펀지케이크 같은 나의 방 책상 서랍 속에는
어릴 적 아빠가 보냈다지만 결국 받지 못했던 만년필이 들어 있군요.
이야기들과 시와 노래를 사랑했어요.
사랑은 값 없이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만약 배울 기회가 있었더라면
피아노도 치고, 그림도 그리고, 춤도 추고 싶었어요.
뭐든 계속 배우고, 이국의 거리를 마냥 걷고도 싶었어요.
그런 것들을 배우거나 그런 곳들로 여행했어도
결국에는 가난했을 수 있겠지만,
더 잘하고 더 즐기는 사람은 어디든 있어서
낙심할 순간은 얼마든지 찾아왔겠지만,
그래도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장밋빛 안개에 휩싸여 있죠.
눈동자에 와닿지 못한 오로라처럼 생의 반대쪽에서 반짝이다가 혼자 사라지죠.
따로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거라서
어린 나는 뭐든 끄적였던 거였을까요.
분명 그 이유만은 아니었을 텐데.
가지 못한 길만 서성이다가 길을 잃어버렸죠.
갖지 못한 것만 바라보다가 주저앉아버렸죠.
숱한 날, 미래의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고,
곧바로 깨닫지도 못한 채 살아갔어요.
쓰다 만 이야기들은 이렇게 내 책상 서랍 속에서 나를 기다렸군요.
몇 번 숨을 불어넣다가 그냥 던져놓아 흐물한 풍선처럼.
때로 터질까 봐 불안했죠.
너무 열심히 불다가는 뻥! 터져 버리고 결국 상처 입을까 봐.
적당히 부풀려서 야무지게 매듭지을 자신이 없어서 입 대는 시늉만 했는지도 몰라요.
풍선을 불래요.
애들이나 좋아하는 풍선껌이어도 좋아.
터지는 소리에 잠깐 놀라면 어때.
남들이 보기에는 무의미한 한숨의 집이면 어때.
나는 내 오래된 책상에 앉아 나를 오래 기다린 이야기들에 마침표를 찍을래요.
느낌표도 좋아! 말줄임표도…. 어쩌면 의미 있는 쉼표도 있겠지, 중요한 건 계속 써 내려간다는 것.
잃어버렸던 만년필도 되찾았는데, 찾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시간을 돌고 돌아, 달리는 마법 열차 내 책상 속으로 온 이 만년필이 있다면, 다른 것도 미래에서 만나지 못하리란 법이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미래의 방 과거의 내 책상 위에서 이야기를 써 내려가요.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이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좋겠어요.
내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때, 내 방도 시시각각 변해요.
어느새 두 번째 서랍 안에는 저 먼 곳에서 날아온 답장이 하나둘 생기죠.
벽에는 액자가 잔뜩 걸리죠.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 속 존재들의 그림이 걸리기 시작해요.
옷장 안에는 내가 입고 밖으로 나가길 기다리는 예쁜 옷들. 눈꽃처럼 하얗고 숲처럼 바스락거리고 하늘처럼 몽글몽글한 것들과 마법사나 농부들이 쓰는 모자들.
그러면 나는 답장의 답장을 쓸래요.
당신만의 방을 생각하면서.
당신만의 연주와 당신만의 그림과 당신만의 춤을 생각하면서.
남들은 다 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당신의 편집된 삶 그 페이지 안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에 함께 울면서.
남들은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거라 말하는 당신의 주저앉은 삶 그 너머에 끝내 일어서 있는 당신을 마주 보면서.
그러라고 돌고 돌아 이 만년필이 나에게 왔는지도 모르겠네요.
하나의 마침표를 찍고, 책상에서 일어서요.
선선한 바람이 창밖에서 불어와요.
나만의 열차는 과수원 근처를 달리고 있나 봐요.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이 청신한 오전의 향기를 흩날려요.
나는 곱게 접은 편지를 봉투에 넣어, 열차 밖으로 연결된 시간의 편지함을 달그락 열어 그 속으로 쏙 집어넣지요.
당신이 언제쯤 그 편지를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우체부란 언제나 절묘한 타이밍에 움직이는 마법사죠.
그는 시간의 과수원에서 온갖 나무를 키우는 과수원지기.
꽃밭에 떨어진 작은 편지도 귀한 씨앗처럼 소중히 다뤄서 당신에게 배달해주면, 당신은 거기서 다시 당신의 이야기를 이어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