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지하철 (4)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삶이 고단할 때, 나는 나만 탈 수 있는 상상의 지하철을 타고 한 칸 한 칸 여행을 시작해요.
그중 스펀지케이크처럼 달콤하고 안락한 나의 방에는, 유년 시절의 동화와 기억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창문 밖으로 어느새 해가 다시 나요.
창문 앞에 놓인 나무 책상 앞에 앉아서 사진첩을 들척이다가 이번에는 가만히 책상 서랍을 열어보아요.
작고 기다란 상자 하나와 쓰다 만 편지들이 한가득.
그 선물 상자 모양을 보니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아서 미소 짓게 되네요.
아빠는 몇 번이나 보냈다지만, 나는 결국 받지 못한 생애 첫 만년필.
펜 대신 멀고 깊은 저 바다에서 그물을 쥐는 아빠의 손은 상처투성이였을 텐데, 아빠는 그 손으로 곁에서 잡을 수 없는 내 손에 만년필을 쥐어주고 싶어서,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휴가를 떠나는 뱃사람들에게 부탁했다죠.
그렇지만 여러 차례 부탁했다는 만년필은 한 번도 내 손에 오지 않았어요.
다만 나는 겉에서 볼 때는 쑥쑥 커가고 있었고, 혼자 입학식을 치르고 중학생 교복도 입고 있었죠.
내내 그 만년필들의 행방이 궁금했어요.
뱃사람 아저씨들이 저 깊고 먼 바다에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났던 건 아닐까.
아저씨들에게도 아빠처럼 너무 보고 싶은 아이들이 있어서 자기 집으로 급하게 돌아가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던 걸까.
고래나 커다란 바다거북이나 어느 이름 모르는 바다 괴물이, 실수로 떨어뜨린 만년필을 꿀꺽 삼켜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그 뱃속에 내 만년필이 있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누구도 콕콕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상상 속에서는 마르고 뚱뚱하고 키 크고 키 작고 수염을 기르고 또는 그때의 아빠처럼 아직도 어린 청년 같은 아저씨들이 이국의 멋진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만년필을 사요.
친구가 늘 자랑하고 사랑하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꼭 어울리는 리본 포장도 점원에게 부탁하죠.
그리고 친구가 꾹꾹 눌러 적어줬을 주소 적힌 종이도 결코 잊지 않죠.
심술쟁이 바람이 그 종이를 또 다른 나라로 날려버리는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생각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선물 꾸러미를 받게 되겠죠.
책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만년필이 한꺼번에 몇 자루나 생기는 거예요.
동생들에게도 나눠주고,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 단짝 친구에게도 한 자루 선물할 거예요.
그리고 가장 멋진 만년필을 늘 새것처럼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마침내 아빠가 돌아오는 날, 만년필을 꺼내 보이며 환하게 웃으면, 아빠는 숙녀가 되어버린 딸이라도 어색하지 않을 거예요.
아빠, 나는 어른이 된 어느 날, 문득 그때 그 만년필은 아빠가 나한테 미안해서 꺼낸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는 딸의 졸업식도 입학식도 가보지 못하고, 작렬하는 태양빛을 한 뼘도 피할 수 없는 갑판 위에서 잔뜩 그을린 손으로 그물을 깁다가, 아니면 사실은 망망대해에서 입김마저 꽁꽁 얼어붙는 갑판 위에서 동상이 걸린 갈라진 손으로 그물을 깁다가, 나중에 딸을 만나면 내가 너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것만은 진실이어서, 아빠도 다니고 싶었던 학교를 떠올리며 갖고 싶었던 만년필 이야기를 지어낸 게 아니었을까 하고요.
그렇다면 지금의 나처럼 아빠도 살기 위하여, 견디기 위하여 환상 속으로 들어간 거잖아요.
그때 아빠의 상상 속에는 내가 있었을 테죠.
오늘 내 판타지 여행 속에 아빠가 있는 것처럼.
사라지고 만 만년필은 오랜 시간 우리를 이어주다가, 이제는 달리는 마법 열차 안 내 오래된 나무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어요.
그 부드러운 감촉으로 써 내려가야 했을 이야기들도, 이제 다시 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