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의 나라

나만의 지하철 (8)

by 새초록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나만의 지하철을 상상해요.

내가 어디 서 있건, 그곳이 어두운 동굴 속이라도 정확히 내 앞에 멈춰 서는 지하철이요.

그 상상의 지하철을 타고 한 칸 한 칸 발을 옮기다가...







물고기의 나라





이제 흐르듯 다음 칸으로 가요.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처럼요.

원피스 자락이 기다란 꼬리지느러미처럼

바다의 꽃 수지맨드라미처럼 살랑거려요.


나는 아무 장비 없이 물속을 헤엄쳐요.

몸이 너무 가벼워서 꼭 내가 아닌 것만 같지만

나예요. 내가 맞아요.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도 돼요.

꿈속에서는 배우지 않은 것들도 잘 해낼 수 있으니.

커리어나 자격증이나 허가증이 없어도

사막을 운전하고, 건물을 짓고, 공연을 하고, 비행기 곡예를 하고, 물속을 탐험할 수 있으니.


온갖 생명체의 고요하고 복잡한 노래를 들어요.

한 자리에 붙어 살아가는 것 같지만 늘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열정을 지닌 산호초와 함께 춤춰요.

고래의 지혜로운 언어를 해독하고 슬픈 이야기에는 같이 뜨거운 눈물을 흘려요.

바로 물거품이 되어 흩어져도 의미 없는 눈물은 없어요.





회사로 오가는 지하철에서 다행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대개는 눈 뜬 채 자기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죠.

내일의 걱정까지 당겨 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오늘 당장의 일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던 나 같은 사람도 있었겠죠.

늘 똑같은 자리로 가곤 하지만 그들의 선잠 속에서라도 꿈틀거리는 열정이 아름다운 꿈으로 피어나 오늘을 견딜 힘이 되었기를 바라네요.


그때 나는 사실 아주 오랜만에 일하러 나간 거였어요.

끊긴 다리는 이미 유물처럼 낡아서 마치 절벽 같았어요.

그래도 외다리라도 놓인다면 건너가 보기로 그렇게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건널목을 건너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고, 언덕을 올라 출근했어요.


사무실 옆자리 나의 동료는 졸음이 쏟아졌는지 마음이 힘들었는지 오후 시간이면 이따금 잠깐씩 책상에 엎드리곤 했는데 그러면 나는 차마 그녀를 깨우지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죠.

그럴 때면 눈 뜨고 자는 물고기들을 떠올렸어요.

그럴 때면 깊은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존재들을 떠올렸어요.





나는 그리 단단한 존재는 아니었나 봐요.

지느러미를 찢긴 물고기처럼 연약한 존재였어요.

천천히 헤엄칠 땐 몰라도 빠른 물살에 휩쓸리면

물에 젖은 나비처럼 헐떡거렸죠.


패전병처럼 다시 돌아오던 길에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필요했어요.


점점 더 혼탁해지는 수조 같았던 사무실도,

눈 뜬 채 자다가 다시 깨어나기에는 너무 느림보 같았던 나의 회복력도,

어느새 커져만 가는 숨기고 싶은 틈새들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집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애타는 상냥함으로

나를 다독였어요.





수영을 배우다가 몇 달 만에 그만두고 싶다고 우리 막내가 이야기했을 때, 나는 어느새 상상의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서, 아이의 까치발로도 닿지 않는 수영장 심연의 냉랭한 타일 바닥을 맨눈으로 보고 있었어요.

내가 모르는 수면 아래서 그동안 혼자 열심히 허우적거린 후에 울음처럼 몰아쉬듯 뱉은 진심이라면, 세상에는 그만두는 용기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키가 자라면 덜 두려운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그때까지 쉬어도 괜찮다고, 엄마인 나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한 넓은 마음으로 아이를 다독였어요.


인생의 어느 전쟁 같은 지점에서 우리 아이가 살고 싶어서 도망친다면, 나는 살아온 것만으로 기뻐서 축하 파티를 열 거예요.

비를 잔뜩 맞은 나비처럼 무거운 날갯짓으로라도 마침내 안락한 나의 정원으로 되돌아오기만 한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입 맞추고 가장 폭신한 수건과 소망의 조각을 아름답게 이어 붙인 담요를 내올 거예요.




그러니 적어도 나는 나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돼요.

그럴 만한 이유가 나에게는 있었고, 안타까운 허우적거림의 분량을 나는 이미 채웠으니까.

그 분량은 누구도 대신 정해줄 수 없고, 다만 나만 알 수 있는 거니까.


나는 나에게 엄마가 되어줘요.

나는 나를 아이처럼 다독여요.

외나무다리를 다시 건너올 때, 세상은 또다시 닿을 수 없는 어두운 심연 같아 보이지만, 희망의 가로등에 이야기라는 기름을 넣어 돌아오는 길의 불빛을 꺼트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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